中庸之道
알지 못해서 불편한 것도 있지만 알고 싶지 않아서 편한 것도 있다. 지적 호기심이 강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사람에게 마음이 떠나듯이 기계에도 마음이 떠날 때가 있다. 너무 오래 다룬 기계와 엮이다 보면 새로운 설비나 예전에 했던 설비로 복귀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제 지금 하고 있는 기계에 마음이 떠난 것 같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흥미도 없고 모르니 더 편하다. 답을 알고 있는 자들이 많은데 굳이 내가 아등바등 알필요는 없다. 오히려 예전에 했던 기계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체계적인 공부도 흥미가 있고 전공 학창 시절도 생각나고 그렇다.
사람도 사람을 향해 이동하지만 기계 따라 사람도 이동하는 법이다. 기계든 사람이든 엮이는 것도 싫지만 엮이게 하는 것도 싫다. 선택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선택 안 해주고 선택을 비껴가는 게 목적이라면 선택해주고 싶다. 그게 중립의 무게중심이고 평온하고 편안한 것이다.
실험용 쥐처럼 이번생은 망했다. 삶의 의미가 사라졌음에도 희로애락이 느껴지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냥 진절머리 난다. 극단적이고 이분적인 그런 사람들이 싫다. 그냥 따뜻한 중도 보수적인 사람이 좋다. 사람 떼라는 것이 참 무섭다. 우르르 편 가르는 것 말이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해도 무관심하게 되는데 무게중심이 반듯한 그 어려운 중도적인 사람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광경은 수긍이 안 되는 것은 나의 가혹함인가? 아무튼 냉정하든 따뜻하든 중립적인 상황이 좋다.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는 것.
선택은 각자 자신의 몫이다. 엮여서 묶어도 선택은 내가 한다. 희망은 좋은 것이다. 그 희망이 각자 다를 뿐이어서 그렇지. 그 정도면 됐다. 보고 있으면 됐다. 생각하고 있으면 됐다. 말하고 있으면 됐다. 거기까지면 됐다. 그러니 그만 봤으면 좋겠다. 그만 생각하게 했으면 좋겠다.
기만이 아니고 범죄 아닌가? 작은 것부터 지켜줬으면 좋겠다. 몰라야 될걸 알아버리면 불편한 게 참 많다. 이제 무심한 것은 호기심을 버리고 알고 싶은 것만 노력하련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왜 다들 모를까? 몰라서 그래서 다들 편한 것인가?
총량불변의 법칙 테스트 결과 장점은 소멸되고 단점은 고스란히 남는 퇴보의 행보다. 고통의 손을 내민 이를 집단의 손익분기점을 따져 퇴짜 놓은 집단이 개인의 이익을 버리고 해쳐 모이자의 모순 그게 세상이치다. 모두가 완벽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실행되지는 않는다.
버려지게 만든 만큼 내버려진다는 총량의 법칙! 극단은 조율하지 못한다. 절충할 자격이 없다. 중도와 중립적 공통만이 상호 조율이 가능하다. 그걸 모르니 편안할지도 불편할지도 모르겠지만 과거의 상처를 보듬는 과정 없이 새로 시작하자는 오만이 바로 독선이고 비민주이다.
미래를 이야기할 때 꼭 나오는 게 과거 만행의 진심 어린 사과이다. 무리한 예이지만 한일 관계든 총칼로 학살한 역사든 다 과거 역사의 언급이다. 무지와 인지의 차이는 인정이고 수긍이다. 그걸 삭제하고 미래를 논하는 무지 때문에 현재의 손을 내미는 자의 손을 잡아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그걸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그 자체부터가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걸 알려고 하지 않는 모순적 개인이 모인 집단에 속해 있는 건 항상 괴롭다. 내가 잘하는 것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 내가 싫증 내지 않는 것 그게 또 다른 지안 아닐까!
이생망 인생이 바라는 것도 많아서 역설적이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 지금 필요한 것은 연명이 아니라 소멸이다. 새롭게 망해서 재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새로운 것이다. 싫증난 사물과 사람들이 군락을 이루는 곳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극복의 첫걸음이다.
다른 건 몰라도 되고 알 필요도 없다. 꼭 필요한 하나만 알면 된다. 그 하나를 모르고 천개 만개를 아는 것이 괴롭듯 그 괴로움을 옆에 끼고 관망하는 것도 괴롭다. 나는 선택한다. 엮든 엮이든 떨어지든 붙든 난 선택해 왔고 또 하는 중이고 아니 본래 그렇게 선택하게 되어 있다. 이제 답이 되었는가?
2025년, 9월 마지막날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