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이 많을 시기다. 건설회사 다니는 지인은 이직(移職)이 빈번한 업종인 만큼 에피소드가 많나 보다. 말인즉 지인의 회사에서 다른 곳으로 이직한 지인의 동료가 하필 지인의 회사에서 발주한 공사 입찰을 따냈는데 담합이 의심된다면서 그 지인의 동료까지 의심하게 된 사례다.
따라서 지인의 건설회사가 발주한 공사 낙찰가와 지인의 동료의 현(現) 회사 즉 발주를 따낸 회사와의 관계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지인의 동료의 회사는 동료의 IP 추적 등 행적을 조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지인의 동료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보안의 이유로 회사의 감시 정도는 있을 것이란 막연히 예상 속에 사내 전산실로 갔는데, 내용인즉 복잡하게 해킹 등의 기술로 사내 메일 등을 홈쳐보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동료의 컴퓨터 모니터가 동영상으로 통째로 저장되어, 언제 어디서든 사전 찾듯이 그렇게 모니터링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동료 회사의 적극적인 감시 덕분에 그 동료는 공사의 입찰가의 유출과는 무관함을 증명하게 되어 억울함은 풀었지만, 지인의 동료는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드보이와 더불어 명대사나 음악이 예능프로에서 자주 인용되는 대중화된 영화가 '신세계'이다. 잔인한 범죄나 깡패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데 꼭 예외가 존재하며, 그 예외가 최애가 되어버리는 경우다. 살아가는 포장된 현실이 더 깡패 같은지 아님 영화 속 깡패들이 더 인간적인 것인지 잔상만 남겨질 뿐 슬픈 영화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어떻게 취급당하는가를 통해 세상의 영역이 읽히고 꿰뚫어진 후 세상은 바뀔 수가 없다는 봉착 앞에 다들 각자의 삶을 마치거나 연장한다. 그러다 보면 그럴듯한 의미를 쏟아내려고 궁리하지 않게 되고 기대에 맞는 해답을 찾으려고 갈구하지 않게 되면서 소멸하고 이동한다. 그저 존재할뿐 삶을 산다는 것이 신세계 영화 안에는 없다.
우리 삶 속 누군가의 적이 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한 것, 따라서 누군가를 미리 불신하고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단정이 누적될 때 신세계를 찾아보게 된다. 주인공 어느 누구도 운명을 알 수 없었고 또 피해 갈 수도 없었던 것처럼 영화 안에 세상의 모든 갈등이 들어있었고 또한 그 풀 수 없는 문제의 슬픈 해답 또한 이 영화 안에 메타포처럼 녹아있었다.
남의 사생활을 궁금해하고 몰래 홈쳐보고 몰래 엿듣고 스스로 타인을 낙인 하는 그런 사회 또한 산다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 그저 존재할 뿐이다. 지인의 동료 케이스로 본 세상에 대한 답변은 '고마해라 마이무따 아이가, 너나 잘하세요' 일뿐.
적당히 일탈하고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이타적인 흐름대로 사는 사람들은 남의 사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다. 따라서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알아도 그뿐이다. 최고의 선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완전함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약점도 가지고 살아가며, 실수도 자책도 하며 최선도 하고 갈망도 하며 살아간다.
오래전에 먹은 신포도가 지금의 이를 시게 하지 않는다. 지금의 이를 시게 하는 것은 방금 먹은 신포도다. 잘못은 잘못이다. 우리가 수없이 많은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와중에도 다른 사람이 혹은 자기 자신조차 크게 인지하지 못하고 망각할 수 있음은, 어쩌면 신이 내리는 은혜인지 모르겠다. 잘못을 저질러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식했으면 또 다른 잘못들을 고쳐 나가라는 뜻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