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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Oct 03. 2020

9번의 붕대감기

김혜진, 윤이형


'가까운 사람들 틈에서 너무나 쉽게 갈등을 만들고, 무엇이 미움과 불만을 부풀리는지 아는 영악하고 지능적인 회사의 실체를 비로소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김혜진의 '9번의 일'중에서)


책의 제목에 사람의 이름은 상실되고 그저 9번이라는 단역처럼 보이는 주어가 내미는 느낌처럼 일은 번호가 매겨져 그 일의 주인은 그저 대체되고 소모되고 쓰다 버려지는 단순 역할임을 암시한다. 김혜진의 '9번의 일'은 먹고 산다는 것에 대한 만연한 피곤함과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미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글이 아니다.


시대는 냉담한 속도로 그들을 지나치는 가운데 또 한 편의 책 '붕대감기(윤이형)'를 우연찮게 연달아 읽으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마음을 나누고 소박한 일상을 유지하다가 언젠가부터 작동이 멈춰지고 망가지는 것들이 답답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짐은 피할 수 없는 잔인한 시대와의 화해도 포기도 체념도 아닐 것이다.


'아 어쩌지? 우린 너무 다르네. 그렇게 그리웠는데, 다시 만나서 너무 기뻤는데, 알고 보니 너랑 내가 너무 많이 다른 사람들인 거야. (윤이형의 '붕대감기, 중에서)


'다르다'와 '같다'는 이미 달 너머로 간 의식의 형상이며 순간 같아지는 척을 하기 위해선 상처 받을 준비가 되어있거나 망가질 준비가 되어있는 삶의 공식을 요구하는 시대에 주어가 행해야 할 무의식의 행동반경이다. 작가는 학창 시절 실습 속 붕대감기의 화두를 일깨워 일상 속의 삶의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애씀이 보인다.


그러나 '9번의 일' 속 9번은 붕대감기의 세상 소견은 무참히 버려진다. 붕대를 다 감고 난 후 머리 크기에 맞지 않는 부조화의 깨달음이 새로운 관계 회복의 노력의 출발점보다 새로운 다름의 상처로 봉착되고 결국 봉합해야 할 삶의 지루한 악순환의 반복이고 버팀의 잔소리 공식일 뿐 삶의 윤기와 활기와는 거리가 멀다.


질문을 질문으로 대답하고 빙글빙글 돌리는 비합리적이고 순진한 낙관주의 말들만 내뱉은 세상에게 9번은 이제 소모된 짜증이 싫어 무관심한 듯하다. 잔인한 시대와의 관계에서 배척당하면 그저 일이란 무언가를 잊고 지우기 위해 하는 또 다른 일일뿐 9번이 어떤 것이 되기 위함은 그의 삶의 주체에서 소실되어있는 것이다.


9번은 붕대감기의 순진함을 거부하고 비열하고 엉터리 같은 이 세상에게, 성취감과 자부심은 이미 실종한 채 흉물스러운 실체를 분해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철탑을 해체하며 불안감을 망각하기 위해서 자아분열 속 주어가 상실된 절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세상과 또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기 위해 세상과 단절한다.


'우정요? 저는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이 없는걸요. 전부 친했다가 헤어진 사람들만 있지.'


자신의 빛을 잃어버리는 상실감과 희망 없는 이 세상의 또 다른 9번, 10번, 11번.. 모르는 이들의 실체 없는 외로운 사투 속에서 가끔은 우정은 아니지만 붕대를 감아줄 사람이 9번과 함께 잠시 머물다 가주길 바란다. 그리고 소외되고 처절한 9번의 일이 오히려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2020년 10월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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