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방
- 사유의 방은 어떨 때 방문하면 좋을까요?
지쳤을 때 오시면 좋을 거예요. (신소연 학예연구사 Interview 中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에 갔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개인적으로 3번째 관람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국박 관례상 동시 전시는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번 '사유의 방'은 동시 전시이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즉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허벅다리 위에 걸친 채 사유하는 모습을 표현한 불상이다.
진심이 아닌 것은 티가 나는 법인데 저 반가사유상의 표정들은 그런 티가 나지 않는다. 상심할 때 진심을 대하고 싶을 때 그래서 찾아간 것 아닌가 돌이켜본다. 처음 맞이하는 동시 전시장, 반가사유상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문득 스쳐간 생각이 저들의 시선이 정면이 아닌 서로 마주 보고 있다면 어떨까?
사유는 개별적인 시선인데 사유하는 시선을 관람하는 시선은 사회적인 시선이다. 단독은 개별적인 것이고 서로는 사회적인 것이다. 서로는 비교를 잉태한다. 우리 사회는 서로 비교하면서 살아왔다. 너의 시선보다 내 시선이 더 은은하다? 두 시선들이 교차하는 어떤 경향들이 서로를 간섭, 방해하면서 경쟁할 때 과연 진심이 우러날까?
그래서 국박은 동시 전시를 꺼리는 것인가? 티가 날까 봐? 그렇다면 왜 예외적으로 간간히 동시 전시를 시행할까? 안쪽 어딘가 숨겨져 있는 내밀한 내면을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 사이로 끄집어 내 소통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그러면 동시 전시 자체가 진심이 아닌 것이 아닌가?
'우리가 자꾸 어긋나고 상대를 향한 모멸의 흔적을 남기게 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고 매기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냥 그것은 시작과 동시에 숙명처럼 가져갈 수밖에 없었던 슬픔이라고'
-나의 사랑, 매기- (김금희) 중에서.
인간 존재는 양립할 수 없는 많은 혼란과 위태로운 것들을 생산하며 살아가고 있다. 국박의 예외적인 동시 전시, 즉 반가사유상의 정면을 향한 서로의 시선은 불가능한 화해를 서로 함께가 아닌 서로의 개별적인 시선의 무게로 받아들이라는 시그널은 아닐까?
어느 작가는 그랬다. 상대방을 위로하기에 충분한 것은' 따뜻한 눈빛, 묵묵한 끄덕임, 진심 어린 마음'이라고.
반가사유상의 시선은 사회적 선함의 미덕을 골고루 함유해서가 아니라 저 불상의 시선을 보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반가사유상의 그 무엇인가에 우리가 사로잡힘에 그런 것이 아닌가?
반가사유상의 동시 전시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으로 숨어드는 집요한 사회적 접근도, 막무가내 고립되는 철저한 개별적 외면도 아닌, 사회적 시선과 개별적 시선이 교차하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시선을 서로에게 인식시켜 위태롭지도, 불안하지도, 충돌하지도 않는 교차되는 감정을 느껴보라는 자연스러운 진심이 아닐까?
이 많은 물음에 대답은 오롯이 개별적인 몫이고 무게이다.
체념하고 포기하고 싶을 찰나 일어나는 좋은 일은 그나마 의욕을 느끼게 한다. 잡혀있던 약속이 취소되니 반가운 요즘, 국박 방문은 그 좋은 일중 하나였다. 개인적인 4번째 관람은 두 불상 중 어느 하나일 것이다. 늘 그렇듯 미래의 약속은 항상 과거에 한다. 미래와 과거! 양립할 수 없는 현재를 느끼며 용산을 빠져나왔다.
-2022년, 2월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