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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Apr 23. 2022

통역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주길 바라면서도 누구도 나를 눈여겨보지 않았으면 하는 두 개의 마음이 그때도 이상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 중에서)


'소통'이 1인칭과 2인칭, 즉 화자(話者)와 청자(聽者)의 관계라면 '통역'은 여기에 3인칭이 개입된다. 통역의 역할은 크게 3가지로 나름 구분해본다. 첫째 언어가 달라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 다시 말해 기계적 통역이고, 둘째는 의중을 제삼자에게 연결고리로서 맺는 정서적 통역이며, 셋째는 기자가 어떤 사안, 사건을 기사화할 때 객관적 사실(Fact)을 근거로 주관적 견해를 담는 것과 유사한 세상과의 통역이다. 여기서 '소통'과 '세 번째 통역'의 구별은 공감과 동의이다. 전자는 공감과 동의를 동시에 요구하지만 후자는 공감에 호소한 후 동의는 각자의 판단에 몫에 맡긴다. '소통'은 실패한 단어로 내리막으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소통이란 단어가 이제 더 이상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한 물질 문명 속도와 가치관이 따라가지 못하는 시대에, 어울리지도 제 역할도 하지 못하는 단어로 이제 막을 내리는 중이다.


반면 '통역'은 정서적 메마름을 감수하더라도 AI처럼 공정한 문명의 일관성이, 가변적이고 속도적인 의식의 흐름에 기준점으로 작용하여 가치관의 흐름에 유연하다는 점에서 현실적 인정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태도로 가늠된다. 소통은 이제 유토피아처럼 이상적 단어라는 현실적 역할의 한계를 용인하는 점, 그리고 대안으로 작용할만한 단어를 찾던 중 무엇보다 끌리는 것은 동의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해준다는 것이 통역 아닌가 싶다. 공감은 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많다. 공감하기 싫은 일도 많고 공감할 줄 모르는 일도 많다. 통역은 일단 어떠한 사안을 공감이란 감정을 끌어내어 인간의 뇌리에서 떠도는 정서적 플랫폼 위에 안착시키는 역할, 즉 통역관의 역할은 모르는 존재를 일깨우는 정서적 전달자로서의 역할이고, 그다음의 사회적 이슈나 반감 등의 공론화의 과정은 모두 통역을 받은 청자(聽者)의 주관적 이니셔티브(initiative) 반응에 맡겨둔다.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을 때가 도움이 될 때가 많기도 하기 때문이다.


'통역'이 소통보다 좀 더 자유롭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 사안이나 선택적 결말의 끝을 내야 하는 경우는 통역의 무용론을 비판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그런 경우 소통이나 통역은 둘 다 무용한 것이다. 그래서 소통은 시대적 끝물의 단어라 규정하고 싶고, 주변을 보면 어차피 소통을 외치는 이들이 제일 소통 안 되는 사람들이다. 가장 '최선의 소통'은 애초 소통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기에 '답정너' 개념을 내재하고 있는 소통은 이제 시대와 결별할 수순만 남아있다. 통역 또한 소통의 결과 도출의 한자리에서 벗어나 스스로 판단을 유보할 수도 있고 결론 내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에 분개할 수도 있지만 '세 번째 통역'의 가장 최고선(最高善)은 사회적 통념에 기반한 상식과 공정을 성급히 결론짓지 말고 다수의 청자(聽者) 또는 독자(讀者) 스스로 선동적이지도 물리적이지도 않는 동의를 도출하는 것이 제대로 된 통역이다. 즉 '상생의 통역'이다.


'소통'이 직절적이고 수직적이면 '통역'은 은유적이고 수평적인 면이 있다. 소통이 좌절되면 분노와 적개를 유발하지만 통역이 실패하면 그냥 체념과 포기케 한다. 다시 말해 통역은 최소한 소통보다 적대적이지 않다. 소통은 그룹 내 안에서 그들만의 돈독함, 불필요한 갈등을 방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협의적 단어'로 축소되고 통역은 모든 세상 사람들 대상으로 여러 의견과 경청을 유도케 하여 스스로 자기와 소통하게 하는 '광의적 단어'로 확대한다. 즉 '자기와의 통역' 그리고 '타자와의 통역'이 서로 일치되면 소위 말하는 '실패한 소통'이 아닌 '무난한 통역'이 되는 것이다. 소통의 일치가 다시 말해 통역이 되는 것이다. '소통과 통역'은 정직과 구별된다. '소통과 통역' 모두 사실(Fact) 토대 위에 기반하기 때문에 '동의한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정직하다 정직하지 않다'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정직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도덕적 판단이 불필요하다.


'첫 번째, 두 번째 통역'의 통역관은 단지 전달자의 역할이지만 '세 번째 통역'은 사안이 파국으로 또는 상생으로 귀결될지는 통역관의 몫이다. 사이비기자나 일명 기레기라고 비판받는 기자들의 기사나 가십거리 수준의 제목 선정, 그리고 편향적으로 대변된 기사는 세상과의 통역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도덕적 판단이 개입되고 결국 파국으로 간다. 상생으로 가기 위해서는 소위 핵심 관계자 통역관은 철저한 무게중심과 현명한 판단, 그리고 역사적 교훈을 항상 겸비해야 하며 때론 스스로 결론지을 수 있어야 한다. 많은 통역관들이 우리들 삶에 개입되어 중재한다면 또 다른 '국룰'이 형성될 것이고 사회적 가치관과 물질적 세계관의 속도의 이격에서 균형을 맞출 것이다. 물질은 항상 사용설명서가 있으나 정서에는 사용설명서를 스스로 써야 한다. 물질의 유행이 빠르듯이 정서적 유행 또한 너무 빠른 시대에 살고 있으니 이제 통역관은 정서적 사용설명서를 정서 사용자에게 적재적소에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시대이다.


사회적 통념과 상식, 결국 우리 생활 속 많은 평범한 이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반영되는 것이 삶의 흔적인데, 존중되어야 할 서로의 삶이 오역되지 않는 사회는 외롭지 않을 듯하다. 통역이 비극적이든 희극적이든 통역은 현재의 삶의 가치관을 반영하며, 때론 결여와 결핍된 삶의 영역에서 슬픔과 고통을 분산시켜 충만한 삶의 영역으로 이입하여 균형된 통역을 한다면 가장 시대에 맞는 이상적인 '상생의 통역'이 될 것이다  '돈이 많은 이들이 가장 살기 좋은 나라'는 다시 말해 '돈이 없는 이들이 가장 살기 힘든 나라'라는 뜻과 같은 말이다. 너무 과잉된 삶만 살기 좋은 것보다, 부족해도 그럭저럭 견딜만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물질과 정서적 균형적 토대를 이루는 사회가 사회적 통념과 상식의 기반을 굳건히 받쳐줄 것이다. 그런 통역관이 많이 생성되길 바라며, 스스로 통역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삶의 언어'를 평소에 망각하지 않게 항상 염두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또 하나의 자신의 삶의 통역이 아닐듯싶다.


'우리는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일은 문학에서 종종 목격된다 (김연수 소설가)


-2022년 04월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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