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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May 14. 2022

사랑

작별하지 않는 요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작가의 말 중에서)


기업의 인수와 합병, 매각 등 여러 종류의 절차가 진행되면 그 이후로는 작별이 진행된다. 주인과의 작별, 동료와의 작별 등 낡음과 새로움이 교차되는 과정은 우리의 삶 속 익숙하게 진행되어 온다. 前 밥벌이터 벗에게서 소식이 왔다. 회사가 새 주인을 맞이하였다 한다.


이런 경우 동료와의 작별은 없고 前주인과의 결별만 있을 뿐이다. 작별, 결별, 이별 모두 헤어짐과 분리됨을 의미하지만 단어가 부여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감성은 개별적으로 많이 다를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주인과 악연의 동료와는 결별, 돈독한 동료와는 이별, 애틋하거나 아끼는 선후배와는 작별이란 단어를 부여할듯하다.


멀어진다는 것! 그것은 무엇인지? 결심과 결단으로 행해질 수 있는 무서운 행위인지 아니면 돌아서서 흔들리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마음을 포기하는 스스로의 놓아버림인지? 문득 저 단어 속에 녹아있는 감성적 변별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간절히 원하는 결별과 간절히 원하지 않는 작별', 메마르고 갈라진 이 틈을 채워주고 이어주는 감성의 끈은 또 무엇인지? 이러한 물음으로 내면을 가득 채우다 보면 자신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남도 알아듣지 못하는 문답만 반복하게 된다. 생각을 끊어내고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 녹음이 자리잡기 전의 거리를 걸어본다.


무거운 계절과 작별을 서서히 뒤로하고 그 틈 속에서 새로움이 돋아나는 시기다. 작별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는 분야는 자신의 의지와 자신만의 행동이 완결되는 그러한 분야라면 나는 요가이다. 아직 비대면이 지배하는 시절이지만 걷다가 둘러보니 신축 아파트 상가 내 요가와 필라테스 간판이 유독 많이 보인다.


겨울에 그 무거웠던 몸과 마음은 그대로인데 힘이 빠지는 것인지 부치는 것인지 몰라도 동일한 아사나에도 힘이 덜 든다는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요가를 마친 후 상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다. 요가와 작별하지 않음은 내가 나를 사랑하고 살아있다는 표현을 몸의 언어로 대변하는 매개가 바로 요가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잡고 몸이 아프지 않게 수련하는 반복적 행위의 그 근원은 사랑일 것이다. 변질되지 않고 같이 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랑이다. 맹목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다가설 줄 아는 것도 사랑이며, 섣불리 다가서기보다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사랑이다. 그 사랑 사이에 놓여있는 그 틈 사이로 아픔이 또한 놓여있다.


작별하지 않음이란, 가족 간의 사랑을 작별하지 않는 것이며, 애틋한 벗들의 우정을 작별하지 않는 것이며, 언젠가 다가올 것이며 언젠가 다가갈 것인 자신과 작별하지 않음을 뜻함이다. 힘들고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함으로 다가서고, 다가온 사랑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면 그 틈 사이에 놓여있는 아픔을 사랑이 매워줄 것이다.

나의 4번째 봄의 요가! 그 이야기의 중심은 상처의 위안도, 평온스러움의 갈망도, 내면적 성찰도, 내일의 다짐을 이야기하는 요가도 아니다. 오늘의 아픔과 그리고 희망과 기쁨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요가이다. 그리고 사랑으로 메워주고 반복하는 지겨움을 덜어내려는 요가 이야기이다.


누가 다음 요가 이야기는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묻는다면 사랑에 대한 요가이길 바란다. 사랑으로 이어진 삶의 언어로 마냥 기쁘지만은 않아도 마냥 아프지만은 않은 요가로 쓰이길 바란다. 언젠가 안착할 자유와 희망 속으로, 또 그 속에서 잔잔한 요가로 평온하고 무난한 여정의 요가로 쓰이길 바란다.


- 2022년, 5월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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