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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Jun 01. 2022

해방

추앙(推仰)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아.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중에서)


'나의 아저씨' 드라마 이후 같은 작가의 드라마에 몰입했다. 대사가 좋아서? 그냥 애절해서? 산다는 것이 슬퍼서? 아니다. 보면서 11회 저 명대사가 나올법한데 드디어 나와서. 근원적이고 자기 본연의 물음에 다가가서 그리고 그 독백의 대사가 와닿아서.


각자의 삶에 집착하기도, 인내하기도, 견디기도 하면서 'What am I?, Who am I?' 본연적 질문에 스스로 맞닥뜨리면 그 답을 향해 아무것도 알 수도, 할 수도 없다는 것에 의지로 발현되든 체념으로 승화되든 무엇이든 간에 그러한 삶이라는 것을 감내한다는 슬픔이 묻어있다.


재미있다는 것, 슬프다는 것은 단편적 감성의 표현이지만 저 서술어의 주어가 '삶'이라면 서술어의 감성을 고민하게 만들 것이다. 이 드라마는 슬프다. 아무리 추앙해도 슬프다. 불행을 통해 작가는 행복의 근원을 교훈적으로 전달하려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냥 이러한 이야기, 슬픈 사람세상 이야기를 쓰고 드라마로 만든 것이다.


우울해지고 싶어서도 아니고, 슬퍼서도 아니고, 처연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그저 나의 질문을 되짚어보기 위해서 보게 된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할 것 같지만 한편으론 단순하다. 무미건조하고 단조롭지만 얽혀있고 꼬여있다. 메마를 것 같지만 촉촉하게 스며든다. 단지 그게 사랑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


추앙은 서로를 채워달라는 조바심이 아니라 갈등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이다. 염미정(김지원 분)과 구 씨(손석구 분)의 서로의 양분을 채워 한계의 치달은 삶의 전환을 간절하게 구애하지만, 그들 스스로 안다. 채워도 채워도 더 깊은 갈망만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살만한 그 갈망을 서로 공유하고 나눠가지는 것 그것이 추앙이란 걸.


그들 다 해방하고 싶어 한다. 단독이 외로움의 홀로가 아니며, 쓰레기 같은 인간들로부터 간섭과 갈등으로부터의 해방이란 것을 영원히 갈구하지만 영원히 못 이룬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슬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해방이지만 세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들 고난을 또 다른 인간에게 부여한다.


슬픈 시간을 감내하다 봉착한 염미정의 독백이 뼈저리게 다가오는 동시에 구 씨의 등장은 봉착된 한계의 자신의 화(火)를 갈구하고 갈망하는 대상으로 결정짓는 장면에서, 종교적이지도, 거룩하지도, 고상하지도 않지만 불편하지 않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누림을 갈망하다 고갈된 감정이 솟구친다.


이 드라마가 말하는 궁극적 해방은 채움이 아니다. 갈망의 성사도 아니다. 관계의 연도 아니다. 해방의 반대어인 욕심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도를 넘은 인간의 욕망이 욕심과 결합하여 관계를 형성하고 집단을 형성하고 이탈자를 생산해낸다. 적당한 욕심으로 합류하라는 애당초 그런 선택을 강요하는 1대 다수의 타협에 대한 분노로부터의 탈출이 진정한 해방이다.


그런 세상이 싫은 것이다. 싫고 염증난 상처는 사랑이란 감정으로 함부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추앙이란 단어를 쓴다. 그래서 이들의 추앙은 눈물겹다. 이겨도 진 게임이 있고 져도 이기는 게임이 있듯이 삶이란 주제를 건드린 이상 밝은 결말은 중요하지 않다. 결말이 비극적이든 희극적이든 이 드라마의 태생 자체가 비극적이다.

'싫을 때는 눈앞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 말을 걸면 더 싫고. 쓸데없는 말을 들어줘야 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 내야 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노동이야.'


석양의 길을 걸었다. 거슬리지 않는다. 차도 사람도 없다. 다시 걸으면 차와 사람을 만난다. 거슬릴 것 같아 가만히 있는다. 멈춘다는 것은 걷는 것을 멈추는 것인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멈추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나는 다만 거슬리지 않기 위해 멈춘다. 석양이 기울고 어둠이 내리면 차와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니 멈춘다.


멈추고 멈추다 보니 감정이 고갈된다. 그러나 이곳엔 추앙이 없다. 해방을 갈망하다 추앙을 갈망한다. 결국 해방이란 갈망의 대상만 증폭되다 해방하지 못하는 것이 해방인지 나는 모른다. 눈앞에 사람이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생각은 여전히 중노동이다. 오늘 나의 글은 드라마와 달리 해피엔딩 귀결의 의지가 나는 없다.

 

그냥 잠시 멈춘다. 멈추는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으련다. 그게 지금의 해방이다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 2022년 06월 01일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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