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마음을 배울 수 없고, 그렇기에 제대로 알 수도 없는 채로 살아간다. 송문은 그 사실을 알았다' (애쓰지 않아도中에서, 최은영)
아주 오래전 밥벌이터에 이런 케이스가 있었다. 굴뚝산업에선 기계와 전기를 다루기 때문에 전담부서가 있다. 근무위치에 따라 전담부서 사람들과의 만남은 제한적인데 그 위치가 필드일 수도 있고 내부일 수도 있다. 드문드문 만남이지만 말이란 것은 위치에 관계없이 넘나들기 때문에 나도 들리는 게 있기 마련이다.
전기 담당자는 트러블이 무엇인지 신호가 어떤지 업무적 교환 후 작업에 들어가도 되는지? 통상적 대화가 이어진 후, 어느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나는 그에게 물어본다. 제가 듣기로 기계 쪽에 계셨다는데 맞는지요? 그 담당자가 맞다고 한다. 대학에서 기계를 전공했고 입사해서 기계팀에 쭉 있다가 전기 관련 자격증을 취득 후 전기팀으로 옮겨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공분야를 바꿔서 현업에서 직접 그 일을 하는 것이 쉽진 않을뿐더러, 굴뚝산업에서 양자 업무적 갈등의 속성으로 쉽게 인력을 주고받을 관계가 아니란 것은 잘 알기에 참 특별한 케이스라고 인정후 어떤 계기라도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통상적인 대답보다 짧은 대답이 왔다.
두 분야의 거리가 다르다는 것이다. 기계 일을 임할 땐 직선의 거리를 두어야 하고, 전기 일을 할 때엔 곡선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간 당시 뭐지? 눈을 맞추면서 의미심장하면서도 진지한 표정 속 답하는 그의 얼굴에서 철학적인 대답인가?라는 직감적 생각도 순간 들었다.
시간이 흘러 이직을 한 후, 듣게 된 그의 소식은 신사업의 투자로 사업장이 신설되고 그의 전공대로 기계팀장으로 발령받았다는 말을 전해 들은 후 역시 일 잘하는 사람은 회사가 필요로 하고 초이스의 영역이 확대된 것은 불변으로 운영되는구나 생각이 든 후 차츰 망각되었다.
통상적인 기계위험성의 Line의 거리와 전기위험성의 Curve의 거리를, 그는 두 분야를 아우른 경험과 와일드한 전공을 바탕으로 한 섬세성을 미뤄보건대, 두 선이 만나는 교집합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란 것을 내게 화두로서 답한 것이 아닌가? 요즘 들어 그 당시 irregular 한 케이스가 자꾸 생각난다.
2차원 평면세대(전자)와 3차원 입체세대(후자)에서, 직선과 곡선이 같은 점에서 출발진행하였을 때 만나는 점의 차원은 추구하는 것이 우선 다르다.
전자는 단순하다. 서로 거리가 멀어지면 영영 멀어지지만, 가까워지면 꼭 만났다가 멀어지는 순환이 반복되는 반면, 후자는 진행되는 직선은 고정되고 곡선만 Angle을 틀어 휘감거나 곡선이 고정되고 직선만 방향을 튼다면, 순간 운 좋게 만나서 그 후 영원히 멀어지거나 또는 만남을 아슬하게 비껴가면서 영원히 멀어진다.
전자는 가까워지면 반드시 멀어지는 것의 반복이고, 후자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직선과 곡선은 서로 방향과 앵글을 틀지 않고 바뀔 수가 없도록 항상 서로 바뀌어야만 곡선과 직선은 불가근불가원의 일정한 거리를 조화롭게 두어야 할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항상 바뀌어야만 바뀔 수 없는 충돌 거리가 유지된다는 말이다.
양자는 큰 차이점은 추구성이 다르다. 전자는 서로 가까워지려는 추구성인 반면 후자는 직선옆에 곡선이 입체적으로 둥글게 휘감고 있어야만 절대 우주공간에서 영원히 만날 수가 없는 것을 추구한다. 전자는 직선과 곡선이 멀어졌다 만나는 지점은 사랑 등의 긍정어이지만, 후자의 직선과 곡선의 만나는 지점은 충돌이다.
그래서 추구성이 다르다는 말이다. 후자는 서로 가까워지면 전자처럼 사랑의 반복이 아니라 충돌 후 잘못하다간 수습할 수 없는 대혼란의 아노미로 진행되므로 일정한 거리가 핵심이다. 균형과 조화의 관점에서 보면 평면세대보다는 입체세대가 훨씬 어렵고 힘들다. 그래서 지금 현실이 힘든 것이다.
평면세대의 직선의 역할을 입체세대에 들이대면 균형은 무너진다. 반대의 경우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므로 성립되지 않는다. 지금은 3차원이상 공간입체세계이기 때문이다. 직선은 성향상 방향이 잘 틀어지는 방면, 곡선은 원심력의 작용으로 미세한 각도가 잘 틀어진다.
그 말은 변화 즉 바뀐다는 입장에선 직선과 곡선 모두 유연할 순 있지만 결과물에 대해 직선보다 곡선이 훨씬 난해하다. 직선이 단순히 가볍게 틀어 곡선 쪽으로 오면 곡선은 입체방향을 계산하고 더 틀어야 거리가 유지되니 벅차다.
반대로 곡선이 자기도 모르게 원심력으로 각도가 틀어지면 직선이 물론 틀어줘야 거리가 유지되지만 직선은 그렇게 하려 하지 않는 경향성이 있다. 바로 추구성이 다른 이유 때문에. 사랑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지만 충돌은 피해야 하는 것인데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곡선이 더 진이 빠지고 힘이 드니 직선이 잘해줘야 된다.
변화 즉 무엇이 바뀌었다는 것은 바뀌기 전에 평면에 고정된 무엇인가 있었다는 것인데, 애당초 존재가 없었는데 바뀌었다는 것은, 직선이 주장하는 시스템도 아니고 변화도 아니고 단순히 마음이 변덕스럽게 바뀌었을 뿐인데 곡선 보고 따라오라니 가당치가 않다. 그럴 바엔 곡선은 안 바뀌고 직선과 영원히 거리로서 멀어지고 싶을 뿐이다.
'최악의 인정 욕구는 자기 아픔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평면세계의 경쟁은 인정 욕구의 갈등과 다툼인 반면 입체세계의 공생은 자존 욕구로 귀결된다. 전자의 인정 욕구는 직선과 곡선의 멀고 가까움의 거리를 시간으로 측량했지만, 후자의 자존욕구는 직선과 곡선은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휘감을 뿐 절대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어야 공존하니 거리로만 인정한다.
구세대이고 기득권이 직선이고 요즘세대이고 약자가 곡선이라는 말은 아니다. 누구든지 직선이 될 수 있고 곡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수시로 바뀔 수가 있다. 시대가 다른 태생 세대들이 모여있는 현실에 Line과 Curve의 출발점 또한 다르고 평면이 입체로 공간탈바꿈한 시기조차 가늠치 못하는 직선들은 모른다.
일어나서 기대할 하루가 없다는 곡선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MZ와 非 MZ의 사회적 충돌은 냉혹한 자본시장과 맞물려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중요한 이슈다. 키오스크, 재택근무, Chat GPT 이런 시스템의 생성은 직선으로부터 멀어질 수만은 없으니 현명한 일정한 거리를 정하고 싶은 곡선의 존재 욕구의 바램이다.
현세대가 공존하며 서로가 인정할만한 분명한 것은 현재는 고차원의 입체세계이고 직선과 곡선의 역할이 평면세대와는 다르다는 것! 그런 직선과 곡선들이 끊임없이 자전과 공전의 힘으로 충돌을 피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아는 자가 현세대의 현명한 직선이고 또한 곡선이다.
입체세대들은 애쓴다고 거리가 가까워지거나 애쓰지 않아도 거리가 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평면세계의 직선과 곡선은 애쓰거나 말거나 거리의 간격을 논할 그 대상 아니라는 것도 당연히 안다. 애쓴다고 알아지지 않는 것은 애쓰지 않아도 나중에 자연히 알아지게 되어있다는 것 또한 안다.
분명 그 당시 알듯 모를듯한 대답을 하고 스쳐간 그 특별한 케이스는 살아가며 삶을 한번 통찰해 보는 계기가 된 좋은 경험이다. 그러고 보니 지나온 삶의 인연이 될만한 3차원 입체세계의 직선과 곡선들이 나에게도 존재했나 보다. 단지 내가 몰랐을 뿐이다. 내가 내 마음을 배울 수 없었고 나는 그것을 다시금 알았다.
내가 내 마음을 알아야만 비로소 삶은 단단해진다. 그리고 나는 현재 어디가 평면인지 어느 곳이 입체인지도 당연히 안다.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살아왔으니. 어떻게 죽는지 모르고 또 죽을 것이다' (시선으로부터中에서, 정세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