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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Sep 27. 2022

Quizas, quizás, quizás

[East]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Quizas, quizás, quizás



조금 더 가까이, 여자는 남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노란 조명이 만드는 그림자 구석구석에 진한 꽃향기가 스미고, 두 사람의 호흡에 온 방이 동요한다. 남자는 조금씩 여자의 곁으로 다가앉고, 여자는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는 영화의 대사들이 이따금 어지런 침묵 속으로 흩어진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한순간도 지울 수 없다. 시간을 그대로 붙들어 두고 싶은 남자의 바람과 달리, 영화는 재촉하듯 착실히 다음 장면을 재생한다. 자주 엇갈리는 시선과, 나란히 놓인 한 쌍의 손, 그리고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 별안간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남자는 마침내 분명한 여자의 시선을 느낀다.


남자는 모든 것이 시작된 일전의 밤을 떠올린다. 온갖 시끄러운 불빛과 휘청이는 사람들 속의 두 사람. 그것은 꿈처럼 흐릿하지만 분명 두 사람 모두에게 일어난 일이다. 택시를 잡아탄 그들은 다시 한번 조용히 입술을 포개었고, 여자는 남자의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그 밤 두 사람은 오래도록 고요한 도시를 걷는다. 잠시 머물며 시선을 나눌 장소가 많지 않았기에, 벤치를 발견할 때마다 그들은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남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의 장면들을 수도 없이 떠올리고,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끝내 새벽은 밝아오고, 오랜 산책을 마친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잠에서 깬 남자는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몇 번이고 확인한다.


그 밤 이후 그들은 심한 감기를 앓는다. 여자의 침대 머리맡에는 남자가 전해준 감기약이 그들의 기억을 증명하듯 자리 잡는다. 여자가 감기약을 돌려줄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두 사람은 차례로 짧지 않은 여행을 떠난다. 남자가 먼저 도시를 떠났고, 여자는 남자가 돌아오기 꼭 하루 전날 기차에 오른다. 며칠 먼저 돌아온 남자는 자주 여자의 빈 방 앞을 서성이고, 여자의 방으로 향하는 길목의 계단실에서 매일 밤 담배를 하나씩 태우는 습관을 기른다. 서너 알이 남은 감기약 위로 먼지가 쌓이고, 창문이 없는 층계참에는 남자의 담배연기가 자욱하다. 마침내 긴 여행에서 돌아온 여자에게, 남자는 주저하며 인사를 건넨다. 남자는 모든 것이 그새 흐릿해진 것은 아닐지 사뭇 두려워하고, 여자는 미묘하게 주춤이는 시선에 혼란스럽다. 한 가지만이 분명하다. 그들은 서로의 마음이 궁금하다. 남자는 방에서 혼자 영화를 볼 것이라 넌지시 이야기하고, 그날 저녁, 여자는 먼지 쌓인 감기약을 들고 방을 나선다.


조금 더 가까이. 여자는 남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만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고, 여자는 결국 뒤돌아선다.


도시를 떠나는 날, 남자는 홀로 침대에 걸터앉아 그날들을 떠올린다. 어느 가을밤 꼭 한번 주어진 마지막 기회와 지구의 반대편으로 여자를 실어 보낼 비행기의 무심한 이륙을 곱씹는다. 방을 나서기 전 남자는 아주 천천히 담배를 태운다. 눈을 감고, 마지막으로 그날의 향기를 몸속 깊숙이 호흡한다. 엇갈린 시선과 머뭇거림, 그리고 끝내 전하지 못한 한 문장. 남자는 남은 것들을 모조리 태워 두고 오려 하지만, 그럴수록 그것들은 오히려 남자의 마음에 강하게 새겨진다. 자욱한 연기는 창문 밖으로 흩어져, 방안에 남자의 흔적이랄 것은 이미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 남자는 마침내 방을 나선다. 한때 두 사람이 가득하던 곳. 이제 거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Fin.

From th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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