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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Sep 27. 2022

우리는 그 일을 비밀로 하기로 했다

[West]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 일을 비밀로 하기로 했다



연우는 무릇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양 입술을 모았다가 혀끝을 윗잇몸에 대면서 완성되는, 여린 질감이 좋았다. ‘이별하는 가을의 밤은 무릇 아프다’는 가사의 노래를 즐겨 듣던 무렵, ‘무릇’은 연우가 네 번째로 자주 쓰던 부사였다.


연우가 무명의 잡지에 토막글을 연재하던 가을이 있었다. 그해 가을을 회상하는 연우의 기억 속에는 늘 희재가 묻어난다. 짧은 타향살이를 하던 시절, 두 사람은 같은 방을 공유했다. 살아온 궤적이 너무도 달랐던 두 사람이라 한동안 어색한 적막만이 방을 메웠다. 하지만 대단치 않은 질문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알아갔고, 오래지 않아 대화는 종종 살아갈 얘기로도 이어졌다. 외로운 시기였기에 둘은 각자의 업무를 끝낸 후 평일이든 주말이든 낯선 고장의 곳곳을 같이 돌아다녔다. 이내 둘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서로를 챙기기 시작했는데, 그건 아무도 나서지 않아 점점 제 기능을 못하던 공용 냉장고를 혼자 고치던 희재를 연우가 목격한 다음부터였다. 공짜 수리에 성공했다고 희재가 자랑하듯 연우를 향해 손을 흔들며 외친 이후, 이따금 연우는 말없이 희재를 한참 바라보았다.


주말에 바람을 쐬러 가기로 한 두 사람의 약속은 자주 늦어졌는데, 그중 8할은 연우의 원고 마감 때문이었다. 유달리 타자가 느린 연우였기에 노트에 적은 글감을 메일로 송부하는 데 힘들어했다. 희재는 그런 연우를 대신해서 종종 원고를 타이핑해주곤 했다. 워낙 글과는 인연이 없던 사람이라 꽤나 애를 먹으면서도 계속해서 연우의 노트를 가져갔다. 하루는 글씨를 알아보느라 힘들었다며 ‘대체 무릇 같은 말을 누가 쓰냐. 가뜩이나 글씨도 작아서 알아보기 어려운데 쉬운 말만 쓰라’며 투정을 부리면서 연우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런 희재의 머리 위에 툭, 연우는 턱을 얹으며 말했다.

 “너 빼곤 다 알아. 바보야,”

며칠 후, 주말에 나란히 누워보던 예능프로그램에 유년기를 외국에서 보낸 한 아이돌 가수가 나왔다. 그는 잘 모르는 우리말의 예로 ‘무릇’을 들었고, 그걸 본 희재는 저거 보라며 으스댔다. 자기만 모르는 게 아니라며 우쭐거리는 희재의 웃음에, 무릇이라는 말에 희재가 서렸다. 연우는 희재를, 희재의 많은 부분을, 희재가 밴 많은 것들을 사랑했다.


고개를 내민 봄의 그림자에 겨울이 가려질 즈음, 희재는 떠났다. 타향살이의 끝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이불을 덮고 잠을 잔 날은 많았지만, 어떠한 고백이나 약속이라 할 것은 없었다. 연우는 자신이 헤어짐을 겪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다만, 어느 지점이 희재를 지킬 수 있던 마지막 순간이었는지를 한동안 추적했다. 수많은 가정이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진실이 되진 못했다. 시간이 흘러 돌아온 서울의 방에서 투명한 선풍기 팬을 닦다가 연우는 여름이 소리 없이 다녀갔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만 털어내야지. 연우는 다시 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무심하게 투고할 곳 없는 글을 쓰던 저녁, 습관처럼 쓴 ‘무릇’ 두 글자가 연우의 눈에 찼다. 곧바로 목울대를 건드리는 토기를 참지 못했다. 연우는 아무것도 게워내지 못하고 희재만을 토해냈다. 여전히 무릇 앞에서 무너졌다.


기억의 뒷모습을 좇던 연우가 멈춰 선 건 여름바람이 들추어낸 나무의 상흔 앞이었다. 온갖 날벌레가 꼬이던 그 구멍 안에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커먼 그곳을 연우는 한동안 가만히 응시했다. 아주 깊이 파인 구멍에는 마치 진물이 나는 것처럼 물기가 어려 있었다. 모두 다르게 각자의 계절을 앓고 있구나. 연우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꺼내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이내 방향을 틀었다.


무궁화호에 몸을 실을 때면 연우는 종종 희재와 나란히 누워있던 도시를 지난다. 익숙한 육교, 아파트, 천변, 사거리. 아무도 닦지 않는 빗물자욱이 지저분하게 남아있는 기차 차창 너머로 보이는 장면이 알알이 박힌다. 모든 장소에 희재와 연우의 그림자가 스친 것도 같지만, 흐려진 초점이 선명해진 순간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상기한다. 연우는 다시 펜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일을 비밀로 하기로 했다.’



Fin.

From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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