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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Oct 04. 2022

다른 이름으로 사랑을 부르는 이유는

[West] 사랑은 메타포에서 시작된다


다른 이름으로 사랑을 부르는 이유는



Metaphor.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말.


사랑을 이야기하는 많은 작품에서 사랑의 대상인 너는 본래의 이름이 아닌 다른 말로 명명된다. 이유는 다양하다. 사람들이 알아보는 재연배우임에도 옛 연인 재훈과 떳떳하지 못한 관계를 지속하는 『나의 사랑, 매기』의 ‘매기’는 유일하게 둘을 향해 예쁘다고 말해 준 순댓국집 사장으로부터 이름 지어진다. 서로가 다른 두려움을 가졌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쿠미코는 소설 속 주인공 ‘조제’의 이름을 따와 스스로를 칭한다. 츠네오는 ‘조제’라는 이름으로 쿠미코를 부르며 사랑한다. 두 닮은꼴의 사랑을 그린 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에서 부모를 잃은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짓는다.

“넌 내 이름을 만들어줘. 난 네 이름을 만들어줄게.”

크림과 케이가 된 그들은 사랑했고 또 죽어갔다. 수많은 이야기에서 너는 이처럼 평생토록 불려 온 것과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기록된다. 원래부터 절대적인 이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각한 대상을 약속에 따라 ‘하나의 기호’로 부를 뿐이라지만, 무엇이 너를 나만의 언어로 다시 이름 붙이게 만드는 걸까.


새롭게 명명하는 과정은 유일무이함을 야기한다. 오직 사랑에 속한 두 사람만이 아는 밀어가 탄생한다. 사람들이 알고 있던 나와 너는 사라진다. 세상 곳곳 적혀있는 너와 나의 이름이 아닌, 고유의 존재가 되어 사랑한다. 이는 곧 일종의 권력을 부여함과 동시에 분명한 한계를 만든다. 새로운 기호에 대하여 합의를 이룬 대상 ― 달리 말하여 사랑의 대상 ― 이 부재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이름으로 기능할 수 없다. 내가 한때 매기였음을, 조제였음을, 크림이자 케이였다는 걸 증명해줄 사람은 오직 너뿐이기에. 사랑의 순간은 철저하게 독립적이고 외로운 기억이 되기도 한다. 이름을 만들어주는 것에서 나아가, 서로를 서로의 이름으로 맞바꾸어 호명했던 여름날을 다룬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한때 나의 'Eilo'였던 Oliver의 결혼 소식을 들은 Elio는 모닥불 앞에 웅크려 앉는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랑이 남긴 감정의 소용돌이를 끌어안은 채, 온 힘을 다해 삭히는 그의 분투를 잠시 멈추게 하는 건 “Elio”라고 나지막이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다. 사랑의 순간만큼은 올리버로 존재했던 그는 그렇게 본래의 이름을 되찾는다. 이 순간이 곧 사랑으로 써 내려간 서사의 끝이다. 둘만의 언어로 정의되는 것이 과연 이름뿐일까. 모든 사랑은 오직 그 테두리 속 인물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요소들로 가득 채워진다. 사랑은 지독하게도 개인적인 것이며, 그러한 사랑의 영역에서 사실성은 효용을 잃는다. 온갖 메타포로 사랑은 시작되고 점철된다.


너. 나의 '너'와 내가 함께 했던 날들에 사실이란 중요하지 않았다. 선릉에서 역삼으로 올라가는 언덕배기에서 우리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뉴욕 맨해튼의 마천루 아래를 거니는 이들이 되기도, 후암동 어느 뒷골목 만두집은 홍콩의 음습한 골목 어귀에 위치한 작은 노포가 되기도, 풍랑주의보와 함께 온몸이 엉망이 되었던 우도의 절벽과 비바람은 늦가을의 스코틀랜드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기도 했다. 조금 더 거슬러 네가 내게 처음 다가왔던 날을 선명하게 재현해본다. 반갑다는 듯 멀리서부터 큰 소리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두 팔을 흔들며 인사하던 바보스러운 몸짓이 조금 부끄럽고 못내 사랑스러웠다. 그건 내게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일렁이는 봄의 그림자 같기도 했고, 웃음이 비져 나오는 기이한 환상동화를 닮은 것도 같았다. 너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이름이었든, 너의 모든 행동 말 눈빛 그리고 숨소리까지 내게 다다랐을 때는 본디 지니던 특성을 잃어버렸다. 한 편의 시처럼 무수한 함의로 넌 존재했다. 그래서 더더욱 사랑이 떠난 후 쉽사리 부정하거나 지우지 못한 채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언어로서 오래 간직하고 있었다. 지극히 사적이었던 너와 나의 사랑. 하지만 누구나 가져보았을 사랑의 메타포. 끊임없이 '너'를 호명하며 새로운 약속을 만들어내고, 각각의 무이한 세계를 창조하며 또다시 사랑을 틔운다.



Fin.

From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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