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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Oct 12. 2022

지는 법을 잊은 사람

[East] 사랑은 메타포에서 시작된다


지는 법을 잊은 사람



꽃을 자주 사지 않습니다. 그건 금세 시들어 버리니까요. 그럼에도 꽃을 들여야 할 일이 생긴다면 다발 채 뒤집어 벽에 걸어둡니다. 그렇게 하면 서서히 생기를 잃다 고개가 꺾이거나, 실수로 물을 제때 갈아주지 않아 썩게 된 몇 송이를 버리지 않아도 되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쓰레기통에 꽃을 넣는 일은 정말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나요.


하얀 벽 위로 하릴없이 바래가는 봉오리들을 바라보며 어째서 이렇게까지 작아져야 할까 생각하는 일. 옷을 갈아입다 얕은 바람이 불어 잎이라도 하나 떨어지면 어떤 이별이라도 겪는 듯 마음 아파하는 일. 멍하니 누워 천장을 보려다 마주한 얼굴에 그래도 네가 꽃은 꽃이구나, 하고 감탄하다 잠에 드는 일. 그리고 하나뿐인 화병에 마침내 완전히 마른 것들을 더하며 ‘예쁜 기억의 무덤’ 따위의 단어를 떠올리고 쉽사리 떨쳐내지 못했던 하루. 꽃은 잘 가꾸는 일만큼 가만히 담아두는 일에도 마음이 듭니다.


이사를 해야 할 때마다 마지막엔 화병 하나씩을 손에 들고 트럭 앞자리에 올라타 바스락대던 우리가 떠오르네요. 우리는 어느덧 세 번의 이사를 함께 했습니다. 이사를 하는 날엔 유독 보랏빛 하늘이 일찍 찾아옵니다. 어쩌면 모든 날들은 그저 밤으로 향하는 여정 같다고 내가 말하자, 당신은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마는 건 싫다고 했죠. 왜 그렇게 모두 져버려야 하고 시들어야 할까. 그러니까, 우리도 조만간 시들게 되는 걸까. 그즈음의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간지러운 마음에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도무지 질 것 같지 않은 것도 있다고, 당신은 여태 지는 법을 잊은 사람 같다고. 매번 생각했다면 당신은 믿을까요.


언젠가 함께 떠났던 더운 나라의 바닷가를 떠올려 볼까요. 당신의 웃는 모습, 어쩌다 마주치는 것이 아닌 일부러 시간을 들여 기다리는 노을, 미지근한 바다에 몸을 누이면 멀리서 들려오던 거리의 행진곡과 어쩐지 알록달록한, 한 입 베어 물면 단 맛이 날 것 같은 그런 밤들 말입니다. 대개 한껏 들뜬 채로, 괜스레 화를 내다가도 끝내 둘만의 춤을 추며 우스운 농담을 큰 소리로 떠드는 우리가 그 속에 일렁입니다.


우리가 보낸 날들의 자릿수가 바뀌므로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라며, 한껏 들뜬 당신은 그날도 꽃 한 다발과 함께였습니다. 결국 시들어버릴 것이라 잔뜩 겁을 먹고 이별의 시기를 당기곤 하는 나 같은 인간의 품에 자꾸만 푸릇한 것을 안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퍽 행운입니다. 섣불리 추억을 정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는 이유로 채 다 피우지 못한 꽃을 사그라뜨리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모든 것이 작아지고, 사라지던 나의 세상에 당신이 피었습니다. 당신이 피어납니다. 당신은 피어나고, 피어나고, 또다시 피어납니다. 무너져 내리는 모든 것들 사이로 그렇게 우뚝.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답기 때문에 깊이 가라앉고 마는 나의 세상에 드물게 더해진 것은 당신입니다. 사랑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Fin.

From th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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