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tipode Oct 18. 2022

좋지 아니한가

[East] So I lit a fire. Isn't it good?


좋지 아니한가

 


가끔은 누군가 붙들고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고, 사는 게 왜 이러냐고. 너는, 나는, 우리는, 이 세상은 왜 지금과 같은 꼴을 하고 있어야만 하느냐고 말이다. 나는 특별히 비관적인 사람은 아니다. 정말이지 웬만한 일에는 그러려니 하고 산다. 그래도 한 번씩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이 너무 구린 나머지 이 거지 같음의 이유를 찾아내 그 시작점에 대고 시원하게 욕이라도 한번 해주고 싶을 때가.


이런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면 언젠가 티비에서 보았던 민원왕 아주머니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서울 모처에 거주 중인 아주머니는 집 앞 가로등의 상태부터 배달 오토바이들의 소음까지, 하루에도 수십 건의 민원을 동사무소와 경찰서, 그리고 각 정부 부처에 전화와 인터넷으로 접수하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었다. “너 나 누군지 알지?” 간신히 울음을 참는 듯 떨리는 목소리의 상담원에게 호통치는 아주머니의 음성에는 당당함을 넘어 어떤 자부심마저 묻어나는 듯했다. 막상 자세히 떠올리다 보니 아무리 그래도 역시 좀 너무했다 싶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항상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을 만들어낸 존재가 집 근처 동사무소처럼 어딘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면, 그리고 가정컨대 아주머니가 세금을 착실히 납부하여 무한에 수렴하는 민원을 접수할 자격을 얻었듯, 나도 어떻게든 자격을 갖출 수 있게 된다면, 한 무더기의 민원을 정기적으로 접수할 의사가 있다. 당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 일들에 대하여.


— 신이시여, 나는 어째서 잊을만하면 한 번씩 큰맘 먹고 산 향수를 병째로 떨어뜨려 깨뜨리거나, 돈을 인출하고는 꺼내가지 않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짓을 일삼는 인간으로 자라난 겁니까. 왜 하필 이 좋은 봄날에, 고작 10분 거리의 자전거를 타다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지는 것이며, 엄카 찬스를 남발하던 치들이 어느덧 자동차와 집을 이야기할 때, 아무리 잠을 줄여보아도 여태 수중에 백만 원도 제대로 부지해본 적 없는 나는 어째서 아직도 매일 밤 바퀴벌레나 때려잡아야 하는 처지에 있단 말입니까. 아아, 도대체 쿠팡 주식은 어디까지 떨어질 것이고, 마감이 다가오는데 이놈의 노래는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며, 이제 5월인데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춥단 말입니까. 무얼 잘못했기에 왕성히 먹고 자고 싸야 마땅할 나이에 ‘공황장애 약 성욕 부작용’ 따위의 단어를 검색해야 하나요. 아, 신이시여. 아아, 봄날이여!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불평이여, 불평!’


어디선가 지긋이 나이가 드신 중학교 한문 선생님의 호통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것참,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맞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의 면면에는 아마도 내 탓이 아닌 요소들만큼이나 오로지 나의 탓인 부분들이 넘치게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이미 초래된 불행의 어디까지가 나의 잘못이고 어디까지가 불운인지 정확히 가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 해변으로 밀려온 파도를 따라 선을 한번 그었다고 하여 앞으로는 여기까지가 바다라고 굳게 믿어버릴 수 없는 것처럼,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가령 “너의 공황장애는 34.5%는 유전적, 32%는 상황적 요인, 나머지 33.5%는 너의 의지박약과 잘못된 선택들에서 유래했단다. 그러니 그때 이렇게 이렇게 했다면 70% 이상은 확률을 낮출 수 있었을 거야.”라고 누군가 확실히 알려줄 수 있다면, 나는 그의 조언을 무조건적으로 따를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서면 다음 파도에 쓸려 사라질 정답은 공허할 뿐이다. 그러니 나 같은 인간들로 가득한 우리네 세상이 이런 모양이어야 하는 이유를 면밀히 밝혀내는 일은 정말로 신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는 이상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다. 누구든 간에 어느 시점에서는 결국 ‘그런가 보다.’ 해야 하는 것이다.


‘So, I lit a fire. Isn’t it good? Norweigian wood’


나는 이 노래가 참 좋다. 이 노래를 알기 전까지는 ‘Yesterday’ 도 좋고 ‘Let it be’ 도 좋고, 다 너무 좋은 노래들이라 고르기가 참 곤란하다는 식이었던 것이 한번 들은 이후에는 비틀즈 하면 곧바로 ‘Norweigian wood’! 하고 대답이 나오는 것이다. 이유를 물어오면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실제로 나는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한 소설의 도입에 등장해서일지도, 반복 없이 한 호흡의 스토리로 끝나버리는 전개가 마음에 들어서일지도, 아니면 다소 어리둥절한 스토리 자체일지, 어쩌면 인도에서 자주 보았던 시타르 소리가 반주에 등장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이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들었고 그건 손쓸 겨를 없이 바꿀 수 없는 나에 대한 하나의 사실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그러고 보면 불행이 아닌 것들 중에서도 그냥이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참 많다. 낡은 가죽 가방을 열었을 때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눅눅한 냄새, 가운데 몇 장이 뜯어져 펼칠 때마다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책들과 시도 때도 없이 고장 나는 지포라이터를 좋아한다는 일, 그냥 좋은 사람, 그냥 싫은 사람, 그리 가깝지 않지만 어쩐지 애틋하게 바라보고 싶은 사람들, 어느 날 선물로 받은 이후 이제는 퍽 소중해져 버린 원숭이 인형, 종종 일어나는 기적 같은 행운과, 난데없이 모든 것이 완벽해지는 찰나의 순간들. 그간 이들의 이유를 밝혀내려는 수많은 시도는 모두 미완으로 남았다.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붙여보아도, 언제나 그것만으로는 조금 모자라다 싶어지는 것이다.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지금의 내가 가진 답이란 ‘그냥’ 뿐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완벽히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알 수 없음’인 것이다. 허망하게만 들리는 이 문답이 마냥 무의미하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 우리를 중요한 질문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불행의 이유도, 행복의 이유도 결국 ‘그냥’이라는 두 음절의 함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기뻐해야 할까, 낙담해야 할까, 아니면 끝내 부정해야 할까. 우리 삶의 자유롭지 않은 부분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문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문제만큼 중요하다. 나는 기왕이면 너무 낙담하지 않는 쪽을 고르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Norwegian Wood’의 화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련의 사건을 겪는다. 초대를 받아 찾아간 어느 여자의 집, 앉으라고 하는데 의자는 없고, 욕조에서 잠을 청하고, 일어났더니 집주인인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불을 지피고는 이렇게 말한다.


‘Isn’t it good?’


자신의 외도 경험에 기반해 스토리를 떠올린 존 레논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자도, 제목의 의미도 정확히 기억하거나 알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함께 노래를 마무리한 폴 메카트니는 존의 사망 후 자신이 제목을 떠올렸으며, 제목은 여자의 방에 있던 ‘싼 소나무 가구’를, 마지막은 난로에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닌 여자에 대한 복수로 집을 불태우는 내용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를 ‘노르웨이의 숲’으로 오역해 하나의 모티브로 삼은 무라카미 하루키는 동명의 소설(상실의 시대)을 발표하며 일약 스타 작가의 자리에 오른다. 제목과 가사의 의미, 존 레논의 실제 외도 상대,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역의 의도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다.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노래를 둘러싼 일련의 소동을 지켜보고 있자면 나는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 된다. 밝혀낼 길 없는 것들 투성이임에도 세상은 꽤나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가끔은 모든 것의 이유를 밝혀내려 노력하는 일을 잠시 멈추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나쁠 것만은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Fin.

From the East.

작가의 이전글 지는 법을 잊은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