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PEDIEM
숙소 구관 입구에서 다섯 걸음이면 도착하는 구글 평점 2.4 술집에서 낮술 한 잔 하기로 하였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늘 숙소에 앉아서 맥주 한 캔 마시면서 하루를 마감하고는 했었는데, 술 안 마시는 연짱이도 없고, 방에 혼자 앉아서 맥주 마시는 건 우리집에서도 하는 일이라, 여행 중 한 번 쯤은 작은 선술집에서 맥주 한 잔 하고 싶었다. 숙소 옆 선술집은 평점 엉망진창이지만, 콩찌암에 체류하는 내내 손님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오후 5시 즈음이면 술집에 손님은 나 뿐일 거고--이게 제일 큰 이유-- 어차피 맥주 한 잔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시간이 아무리 늦어도 오후 6시 30분 쯤일 거라 부담 없다는 점도 이 평 나쁜 술집을 택한 이유 중 한 몫을 하였다. 물론, 숙소에서 도보 단 3분, 5분 거리에 평점 좋은 음식점 겸 술집들 몇몇 있었지만, 어두워지면 급격하게 내게 관심을 보이는 개쉑들을 헤치며 숙소로 돌아오는 모험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2층에 있는 간이 선술집이어서, 올라가도 되냐고 물으니, 아래집에서 웬 아저씨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맨 발로 나온다. 맨 발 마중이라니 여행 중 호사네, 싶었다.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 가격을 보고, 주문하여 나온 메뉴를 보니 이 술집 구글 평점이 왜 그모양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
내가 앉은 자리 난간 바로 옆이 숙소 구관 입구. 엎어지면 코 닿을 곳보다 가깝다. 그래서 왔다. 이 선술집과 딱 붙어 있는 곳은 숙박 업소다. 술집을 향해 창문이 나 있는 객실에 묵으면 정말 괴로울 것 같다. 방음 안 되는 더운 나라 숙소이니 음악 소리 때문에 시끄러운 건 기본이고, 늦은 밤까지 환한 조명은 덤일테니.
내가 자리 잡고 앉아서 주문을 마치니, 주인 언니가 조명을 켜줬다. 예쁘네. 원래는 씽하 한 병만 마시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노련한 언니--아마도 맨발로 나온 주인 아저씨 딸내미--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씽하 한 병을 더 따서 따라준다. 이 언니가 또 전직 술꾼을 알아보네. 감자 튀김에 맥주 한 병 마시고 오후 5시 40분 쯤 일어나려고 했는데, 언니가 한 병을 더 따 준다. 얼른 마시고 빨리 일어날 요량으로 벌컥 벌컥 마시고, 게눈 감추 듯 감자 튀김을 주워먹다가.
아.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이나 서두르고, 늘 불안하고 마음 분주할까. 작은 선술집에 손님이라고는 나 뿐이고, 사실 그것 때문에 온 거고, 숙소까지 나무늘보 걸음으로 걸어도 2분, 뛰면 30초 거리여서 설령 완전히 깜깜해질 때까지 앉아 있은들 개쉑들로부터도 안전하고. 더 무엇이 있나. 더 무엇이 있어서 지금 이 순간 나만을 위해 빛나는 예쁜 별 모양 조명과 호박색 꼬마 전구와 아마도 메콩 강에서부터 불어왔을 오후의 시원한 바람, 그리고 푸르게 떨어지는 시골 마을의 저녁을 누리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을까. 언제부터 나는 순간을 누리는 법을 아예 잊었을까. 짧게는 몇 분 뒤, 내일, 몇 개월, 일 년 뒤의 걱정을 당겨 살게 되었을까. 멀리 갈 것 없이 겨우 며칠 뒤면 귀국이고, 집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나는 다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지 말자. 설령 며칠 뒤 다시 서글퍼지더라도, 지금은 그러지 말자. 지금 만큼은 나만을 위해 빛나는 예쁜 조명, 작은 마을의 푸른 저녁, 비 온 뒤 불어오는 여린 바람을 누려보자고.
'지금 이 술집에 나 뿐이야. 내가 전세 냈어. 얼음 동동 띄운 잔에 맥주 한 잔. 함께 해요.'
'어, 언니. 조명 너무 예쁘다. 누가 봐도 시원해 보이는 맥주네요. 언니 혼자 뿐이라고? 누려, 이 순간을.'
밴드에 맥주 사진을 올리니, 베니아가 웬일로 실시간 답을. 다 함께 독실하여도 선생인 베니아는 맥주 한 잔 쯤 가벼운데, 모태 신앙 도나는 아예 대꾸도 없어.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는 일 따위 없으니, 관심 좀요.
우리나라 맥도날드 3천원 짜리 감자 튀김 정도가 120밧. 콩찌암처럼 작은 깡시골에서 누가 이 돈을 주고 보잘 것 없는 감자 튀김을 먹겠나. 이 선술집은 나처럼 숙소와의 거리가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선술집을 원하는 사람, 그것 말고 다른 건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 말고는 결단코 비추다. 절대 오지 마세요. 훠이 훠이.
우리나라 장마비처럼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콩찌암 저녁이 젖었다.
손바닥 만한 콩찌암. 직선 도로 뿐이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오는 방향 쪽에 아침 시장 겸 저녁 시장이 있고, 반대 편 끝에 왓 콩찌암과 문 강변이 있다. 길을 잃을래야 잃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동네 콩찌암.
머리카락이 짧아서 살랑 바람 불어봐야 나부낄 찰랑한 긴 생머리 없으니, 티비 광고에서 보던 아름다운 장면은 없지만, 마음은 카** 부럽지 않았다. 밴드 톡에 이렇게 올리니, 연짱이가, 그러다 카** 팬들한테 엄마 순삭당한다고. 살려주세요. 저래 보여도 오후 6시 조금 넘은 시간이다.
아, 그래도 오래 앉아 있었다. 추적 추적 비 내리는 저녁 거리에 우울한 네온 간판이 드문드문 켜지는 게 운치 있어서. 비 내리는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언니가 맥주 한 병을 또 가지고 오려고 하네. 언니, 임 래우(I AM FULL), 하니 씩, 웃는다. 대학 시절 친구하고 많이 닮은 미인 주인 언니. 언니 웃는 얼굴이 스물 시절 내 친구처럼 예뻐서, 엉망인 줄 알면서 감자 튀김도 먹고 닭날개도 먹었다. 오후 7시 20분 쯤 계산을 하고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서빙 비 40밧. 음식 양과 질이 이 정도로 엉망이 아니었다면, 80밧 쯤 두고 나왔을텐데. 내일도 올 거지, 언니의 눈빛이 별 조명보다 더 반짝거렸지만,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오늘 하루로 충분해요.
그리고 숙소에 돌아와 오늘의 일기를 쓰고 잠들었다면, 또 이 숙소를 내가 너무 띄엄띄엄 본 거지. 하루 정리 중인데, 순간 엄청나게 시끄러워서 문 열고 나가보니, 2층 공용 공간이 아줌마들로 아주 바글바글. 1층과 2층 빈 방 하나 없이 꽉, 찼다. 아니, 어차피 1층과 2층 모두 꽉 찰 거면, 주인 마님은 도대체 나를 왜 2층으로 보낸 거여? 투숙객 나 뿐이라고 몇 번씩이나 아침밥도 안 주더니. 이래서 사람은 오래 두고 봐야 한다는 말이 있는가 보다. 아니, 오래 두고 볼 것도 없이, 주인 마님은 채 열흘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여러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스로를 포장하고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게 보통 사람 마음인데, 주인 마님은 내게 자신의 성품을 감출 생각도 없으니. 그러기도 참 쉽지 않은데.
이제 이틀 지나면, 체감 상 이 번 여행은 끝이다. 일상을 벗어난 또 다른 일상은 그 끝이 언제나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