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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IZ Dec 30. 2019

고흐, 영원의 문에서

시사회 리뷰

CASTING

반 고흐에 관한 영화가 처음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 커크 더글라스 주연의 'Lust for life'부터 최근의 'Loving Vincent'까지 예술가의 전기 영화 중에 반 고흐는 대표적일 수밖에 없는 주제임에 틀림없다. 시사회 초대를 받고 가장 먼저 생각한 건 '주연 배우가 누구일까?'였다. 그런데 윌렘 데포? 머릿속에 고흐가 된 그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와우!, 작은 탄성과 함께 포스터를 살펴보니,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받았단다, 게다가 스팅을 보니 '인사이드 르윈'의 오스카 아이삭이 고갱 역할을 맡았고, 또 무슨 역할인지는 몰랐지만 매즈 미켈슨까지... 구매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폴 스미스 액세서리처럼, 처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티저 영상을 보았을 때처럼, 꼭 보고 싶다는 강렬한 호기심을 떨칠 수 없었다.     


화가가 감독하고 화가가 찍은 영화

시작 후 처음 몇 장면이 넘어가면서, 무언가 영화가 아닌 것 같은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앤딩 크레딧이 오를 때까지 그 느낌은 지속되었다. 고흐의 불우했던 삶과 사건들, 그리고 그가 그린 작품들의 배경 등, 영화는 이런 줄거리와는 거리가 있었다. 특정한 플롯이나 사건은 기억이 나지 않는 대신, 고흐의 눈망울과 그 눈으로 바라본 정경들이 가슴속 가득 남겨진다.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은 2시간의 고요함 속에, 고흐의 숨결에 귀를 기울인 것 같은 그런 영화였다. 나중에 영화 관련 정보를 보니 줄리언 슈나벨 감독과 브누아 들롬 촬영 감독 모두 개인전 경력을 가진 화가 출신이었다. 실제 반 고흐가 살았던 로케이션에서 촬영을 하면서, 고흐가 보았던 자연과 빛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 윌렘 데포는 반 고흐가 그린 밀밭에서 3일을 보내기도 하였고, 반 고흐가 걸어가는 장면에는 핸드 핼드 카메라를 들고 같이 걸으며 촬영함으로써 흔들리는 관점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약간 멀미가 날 정도로)       


고흐가 남긴 대사들

영화 속 고흐가 남긴 주옥같은 대사들이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중 정확하지 않지만 일부 기억나는 부분을 옮겨 본다. 정신병원으로 고흐를 면담하러 온 천주교 신부(매즈 미켈슨)와의 대화 장면이다. 신부는 고흐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고흐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신부 : 당신은 왜 그림을 그리나요?

        고흐 : 생각을 멈출 수 있어요. 그림을 그릴 때엔 생각이 나지 않거든요.  


고흐에게 생각은 고통의 시간이다. 동생 테오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신의 처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예술세계 등,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생각과 생각 사이에 존재하는 대자연과 하나가 되는 고요한 평화의 시간이다. 보통 사람은 '자연에 대해' 생각하고, 시인은 '자연을' 경험하며 깨어 있는 사람은 '자연이' 된다는 말이 있다. 꽃을 경험한 사람은 꽃에 대해 알 필요가 없으며, 꽃이 된 사람은 꽃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 대사에서 고흐는 자신에 대한 생각을 떠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초월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부 : 내 눈에 당신의 그림은 서툴고 추하고 불쾌감을 줍니다.

       고흐 : 신은 왜 내게 추하고 불쾌한 그림을 그리는 재능을 주었을까요?

       신부 : 신은 당신이 그런 비참한 삶을 살라고 그런 재능을 주었단 말인가요?

       고흐 : 천사는 슬프고 비참한 이들 곁에서 위로를 주고, 때로는 병이 우리의 삶을 성장시키지 않나요?


고흐에게 보여지는 신이 창조한 세상은 모든 것을 포함한 하나의 원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것뿐만 아니라 추하고 슬픈 고통의 이면에도 삶의 오묘한 조화가 내재되어 있다.


고흐, 영원의 문에서

이 영화는 불멸의 걸작이 탄생한 프랑스 아를에서부터 생을 마친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 눈부신 마지막 나날의 기록이 담겨 있다. 고흐는 마지막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의 80일 동안 75점의 그림을 그렸다. 영화는 그 기간 동안 고흐가 경험한 삶의 경이로움을 관객들이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감독은 고흐가 세상을 바라본 방식과 예술에 대한 열정 그 자체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이 영화의 줄거리가 생각나는 대신에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이 담긴 반 고흐의 눈망울과 그 눈망울이 바라본 그림의 배경이 된 정경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20191230024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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