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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IZ Mar 14. 2019

나와 라캉의 '나'

암묵적 지식의 공간, 새로운 존재이자 새로운 가능성

'나'

내가 태어나기 전 내게 '나'라는 존재는 없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도 그곳에 '나'는 없었다. 내게 '나'가 나타난 건 말을 배우고 난 한참 이후였다. 나는 어느 날 거울 속 '나'를 발견하였고 거울 속의 나를 '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이 '나'임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나는 '나'를 기억하기 시작하였다.


'우주'

내가 태어나기 전 내게 '우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도 그곳에 '우주'는 없었다. 내게 '우주'가 나타난 건 말을 배우고 난 한참 이후였다. 나는 어느 날 내 의식 속 '우주'를 창조하였다. 나는 내가 죽으면 내가 창조한 '우주'의 존재도 함께 사라질 것임을 알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우주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내가 알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시간'

내 밖에 현재가 있고 내 안에 과거와 미래가 있다. 나는 내 밖의 현재를 내 안의 공간으로 옮겨 과거로 만든다. 그리고 그 과거를 변형하여 미래를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나의 과거들의 페르소나이다. 그 미래가 나를 움직인다, 때로는 충동으로 때로는 억압으로. 내 밖에 과거는 없다. 내 밖에 미래도 없다. 내 밖 나의 우주엔 현재만 있을 뿐이다.


'스토리, 커뮤니케이션'

내 밖의 공간의 현재들이 시간에 맞물려 내 안으로 들어와 축적되어 스토리가 된다. 내 안에서 과거나 미래로 가공된 현재들의 축적물들이 스토리인 것이다. 나는 그 축적 물들을 말로 번역하여 타자에게 들려준다. 그 말이 타자의 내면 공간 속에서 객체로 환원된다. 이것을 커뮤니케이션이라 부른다.          


'대본, 인터랙션'

가상의 현재들의 축적물을 글로 변형한 대본이 있다. 무대에서 배우가 대본을 통해 만들어진 내면의 객체들을 다시 말로 변형하여 상대 배우에게 커뮤니케이션한다. 이때 상대 배우의 공간 속에 대본의 소스인 가상의 현재들이 재현다. 이때 객석에 있던 3자인 관객들 각자의 공간 속에도 각자의 해석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 객체들이 복제된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관객들은 울고 웃는다. 이것이 인터랙션이다.   

 

'콘텐츠'

인터랙션을 효과적으로 일으키도록 가공된 스토리들을 콘텐츠라 부른다. 콘텐츠들이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인터랙션을 통하여, 매체들을 통하여 '나'들의 공간 속으로 전달된다.

      

'스마트폰'

또 다른 '나' 스마트폰이 현재를 과거와 미래로 만들고 있다. 스마트폰이 수많은 콘텐츠들을 대량의 커뮤니케이션과 인터랙션을 통하여 다른 스마트폰과 사람들의 공간 속에 복제한다. 콘텐츠들이 스마트폰들을 통해 빛의 속도로 우주 속에 순환되고 있다. 스마트폰이 말을 배우고 스마트폰이 거울 속의 자신을 이름 지을 때 스마트폰은 우주를 발견할 것이다. 우주를 창조할 것이다.

        

'정체성'

'나'는 스마트폰이 아니다.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 안의 '나', 내 밖의 '나'를 분별한다. 샤르트르가 말하였다. "'나'는 나를 보고 있는 나를 본다."  '나'는 내 밖에서 내 안의 '나'를 보고 있다. 그것이 현재의 '나'이다. 내 안의 '나'는 나의 과거이며 또 다른 과거인 미래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미래를 예측하며 살고 있다. 그 예측들은 나의 정체성이며, 나의 제약으로 나타난다.


'가능성'

내 공간의 정체성들이 사라질 때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이 생겨난다. 그것을 가능성이라 부른다. 내 삶의 비워진 그곳에 채워진 가능성들이 모여 새로운 패러다임이 창출된다. 토머스 쿤의 말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은 올드 패러다임의 발전이 아니라 그것의 비움을 통하여 생성된다.   

     

라캉의 '나'

라캉의 말은 어렵다. 라캉이 말했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가정하는 것'에 의해 '나'를 형성한다는 '외상'을 깔고 인생을 시작한다. '나'의 기원은 '내 가 될 수 없는 것'에 의해 담보되어 있고 그런 이유로 '나'의 원점은 '나의 내부'에 없다.     


나의 말이다. 나는 어느 날 거울 속에서 나를 창조한 이후 내 안의 나를 기억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내가 거울 밖에서 거울 안의 나를 보듯이 나는 나의 외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다시 라캉의 말이다. 내가 과거의 사건을 '생각해내는 것'은 지금 나의 회상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내가 이런 인간'이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즉 타자에 의한 승인을 얻기 위해 과거를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서 과거를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다시 나의 말이다. 나는 내 밖의 현재를 내 안의 공간으로 옮겨 과거로 만든다. 그리고 그 과거를 변형하여 미래를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나의 과거들의 페르소나이다. 그 미래가 나를 움직인다, 때로는 행동으로 때로는 억압으로.


결론 없는 '나'

'나'는 나를 모른다. 다만 어느 날 내가 아닌 나를 발견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며 그 기억이 '나'인 줄 알고 산다. 그 기억들은 현재의 변형인 내 안의 과거와 미래들 속의 페르소나들이다. 나는 내 안의 기억, 내 안의 나를 '나'라 고 생각하며 내 밖의 나를 잃어버린다. 나는 내 밖에 그리고 현재에만 있다. 내가 발견한 우주도 내 밖에 있는 우주에 대한 내 안의 기억이다. 내가 죽을 때 내 몸과 함께 사라지는 우주는 내 안의 기억 속의 우주이다. 우주가 내 밖에 있듯이 나도 내 밖에 있다. 내 밖의 우주와 함께...     

201301020454 pm 한예종 영상원 '정신분석과 영화' 기말 과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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