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창고
서우의 말이 늘고 있다. 아빠로 모든 사람을 부르던 아이는 엄마, 함무니~, 하부지~로 단어와 억양과 사람을 구분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신체 중 귀(기~)와 코(코~)를 말할 줄 알고 발과 머리, 손가락을 들을 줄 안다. 과일 중 귤(뀰~)을 말할 줄 알고 사과, 바나나, 배, 수박을 구분해서 요구할 줄 안다. 자기 전 달님을 보러 가자고 하면 냉큼 따라나서서 하늘을 휘- 둘러보고 달을 보면 어! 하고 반가워한다.
자기가 만난 것들을 기억하고 구분하는 단계를 지나, 만난 것들에 어른들이 달아놓은 이름을 기억하고 구분하기 시작했다. 보고 듣고 만져보고 냄새맡고 맛보며 마음 속에 쌓이기 시작한 무수히 많은 것들에 이름표가 달리기 시작한 셈이다.
그러던 서우가 이제 형용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에 손을 담그더니
“앗 뜨~”
하며 미간을 찌푸린다. 아마 예전부터 나나 아내가 주의를 주려고 말과 표정을 과장해서 보여준 걸 기억한 듯 하다. 뜨거운 것을 뜨겁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나 반갑고 귀엽던지 절로 박수를 쳤다.
조금 있다가 흙놀이를 한 손을 닦으려 물을 담아 가서 손을 씻으라고 했다. 시원한 물이 담긴 대야에 손을 담그더니
“앗 차~”
하며 미간을 찌푸린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구분한 것이 어찌나 신기하고 대단한지 정작 심각한 서우를 두고 웃으며 기뻐했다. (서우둥절)
그러다 문득, 서우에게 장난감에 있는 초록색을 초록색이라 일러주고, 조금 있다가 먼저 본 초록색보다 조금 더 진한, 파란 기운이 도는 초록색도 초록색이라 일러준 기억이 났다. 두 색은 눈으로 봐서 명백히 다른 색인데 초록색이라 알려주는 게 맞나 싶어 고민이 됐었다.
서우에게 앗 뜨~로 표현된 뜨거움을 표현하는 단어는 일상적으로 쓸 때 뜨겁다, 따뜻하다, 미지근하다 정도로 단계가 나뉘는데 그 사이에 표현되지 못하는 뜨거움은 매우, 조금, 적당히라는 부사로 보완하고 있구나 새삼 돌아봐졌다. 차가움도 마찬가지고.
서우가 느끼는 감각은,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세밀하게 나누려 하면 무한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일곱가지 무지개의 색 사이 무수히 많은 스펙트럼이 물결처럼 흐르는 것처럼, 숲에 핀 나뭇잎과 풀들에 물든 한없는 초록빛처럼.
마음에 있는 그대로 새겨진 것을 말로 담고, 말로 담은 것을 다시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뭉뚱그려지고, 하나로 묶이고, 생략되는 것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렇게 어느 순간 가 버린 파랑과 진한 파랑 사이의 쪽빛에 가깝지만 보라빛이 돌기도 하는 이름 모를 색은 어른이 된 지금 혹은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감수성이나 섬세한 감각은 타고 나는 것도 있지만 경험한 것에서 길어내는 부분이 크지 않을까 싶다. 서우가 지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저장하는 시기라고 한다면 더욱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게 해주고 싶다. 감각의 창고에 세상의 많은 것을 차곡차곡 보관하도록 돕고 싶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점점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보다 알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게 많아질 때 감각의 창고를 열어 많은 것을 꺼내어 썼으면 좋겠다. 코 끝에 스치는 바람에서, 두 눈에 스치는 작은 벌레의 날갯짓에서, 귀에 들리는 불규칙한 리듬에서, 발바닥에서 스르르 빠지는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어느 이름 모를 지역의 식당에서 맛보는 나물 반찬에서,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고 정확한 단어가 딱히 없지만 말로 풀고 글로 적다가 만나게 되는-분명히 바로 여기에 있는 무언가를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서우가 세상에서 만나는 것들에 자기 나름의 단어를 찾고 이름을 붙이는 동안 나의 이름, 어른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은 어느 정도가 적절할까? 잠깐만 생각해봐도 끝이 없다. 나는 다만 내 말과 글이 어떤 것을 담고 어떤 것을 생략하는지 점 하나 찍고 다시 또 찍는 것처럼 들여다봐야겠다. 그리고 그 말과 글 속에서 내 안의 먼지 쌓인 감각 창고를 열어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봐야겠다. 언젠가 서우와 서로의 창고를 활짝 열고 함께 구경하며 보물을 주고 받는 날을 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