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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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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Jan 27. 2019

800일

오늘은 서우의 800일이다.

이제까지 서우 관련해 꼬박꼬박 챙긴 것은 (99% 아내가 챙김... ㅋㅋ)

매달 크라잉베베 사진첩을 만드는 것과, 서우의 백일 단위를 기념하는 것이다.

초에 불을 붙이고 함께 노래 부르고 후- 불을 끄는 것부터

케이크를 나누어 먹는 풍경이 소소하지만 행복한 순간이다.


엄마가 밥솥에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는 걸 들은 서우는

이제껏 잘 놀다가 밥솥 앞에 가서 자꾸 열어달라고 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열면 케이크가 맛없게 되니까 다른 거 하고 놀면서 기다리자고 했는데

돌아오는 답은 '열어줘, 케이크 봐봐. 케이크 먹어." 뿐이다.

온 식구가 돌아가며 서우의 분노와 짜증을 달래는 동안 40여 분 남짓한 시간이 갔다.

그러다 문득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서우가

"이제 괜찮아졌어."

하더니 생글생글 웃기 시작한다.

언제 봐도 감탄하게 되는 감정의 전환.

서우에게 감정은 터널과 같은지 지나고 나면 언제 어두웠냐는 듯, 아무런 뒤끝이 남아 있지 않다.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다. 똑똑히 기억한다.

"어제 많이 울었지. 자기 싫어서 그랬지."

지나가듯, 남의 말하듯 한다.


정말 그 순간에 자기가 화가 났을 뿐,

남 탓을 하거나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조건을 달지 않는다.

나도 어렸을 땐 저랬을 텐데 싶으면서 서우는 언제부터 뒤끝이 남고 조건을 달기 시작할지 벌써 아쉽다.

그러나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그렇게 때가 묻어야겠지 싶긴 하다.

화를 벌컥 내다가 오해라는 걸 깨닫고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진심으로)

그 사과를 그대로 받아줄 사람이, 어른이 얼마나 있을까?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 난다라고 했는데

오히려 아이들은 털이 없고 어른들은 털이 있으니 뭔가 잘못된 말 같다.

울다가 웃는 건 아이들 전문 분야다.


때마침 밥솥에서 삐-삐-삐- 소리가 나며 만능찜이 완료됐다고 한다.

두 눈이 동그래진 서우가

"케이크??"

하더니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소식을 알린다.

"할머니!!!! 케이크 다 됐어!! 할아버지!!! 케이크 먹자!! 삼촌아!! 케이크~ 엄마!! 케이크 주세요!!!"

바나나케이크가 밥솥에서 나와 따끈한 김을 뿜어낸다.

우와~ 감탄을 연발하던 서우는 초를 꺼내는 동안 의자에 앉아 잔뜩 설레어 히히 웃는다.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 초를 꽂고 노래를 부르고 후- 불을 끈다.

오늘도 한 번 불고 "먹을까?" 해서 아쉬움에 한 번 더 하자고 했더니 그러자고 한다.

처음으로 케이크 커팅도 나랑 같이 했는데 표정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낮잠을 못 자서 졸려하던 서우는

이를 닦고 나서 입을 헹구는 문제로 울고 불고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다가

짐볼 리듬을 타고 피곤에 떠밀려 잠이 들었다.

안겨 잠든 아들을 눕히고 몸을 빼낼 때 

움찔거리는 몸짓과 이잉 하며 눈을 감고 울음 시동을 거는 소리가 어찌나 스릴 있던지...

다시 깨면 끝이다라는 절실함으로 무사히 방에서 나왔다.


800일의 밤, 서우에게는 어떤 변화가 또 일어나고 있을까.

자기 전 잔뜩 화가 났던 기운이 아침까지 남아있지 않을까,

아침이 아니라 7살, 10살, 20살까지 남아짔지 않을까 

근거 없는 죄책감이 멀리멀리 간다.

죄책감에 빠져 있으면 무언가 한 것 같아서 책임을 안 지는 좋은 명분이 된다.

죄책감은 가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실질적인 무엇인가를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먼지 쌓이던 이 공간에 글을 쓴다.

실질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나는, 아빠로서의 나는 이랬다고 남기고,

남겨서 내일을 위한 디딤돌이 되기를

어제보다 덜 게으른 오늘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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