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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Oct 15. 2019

아빠의 노래

1.

아빠는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푸르게 펼쳐진 바다를 보는 아빠의 등이 조금씩 들썩이는 듯했다.

동그랗고 단단해 보이는 아빠의 등을 보니 문득 옛날 아빠의 몸이 떠올랐다.


한창 헬스를 열심히 다니던 아빠의 팔뚝과 어깨는 울룩불룩했고 단단했다.

등은 단단하고 기립근이 선명했다.

배는 불룩했고 조금 단단했다.

단련된 상체에 비해 하체는 초라해 보였다.

나는 아빠랑 다르게 하체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이상하게도 상체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빠의 몸을 만질 수 있던 순간은 함께 목욕탕을 갈 때 등을 서로 밀어줄 때였다.

매일 깨끗이 몸을 씻는 아빠의 등에서는 때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매끈하고 동그랗고 단단한 등과 어깨 위를 노란 혹은 초록색 때밀이가 지나가곤 했다.

싱겁게 아빠의 등을 밀고 나면 내가 돌아앉았다.

내 등에는 때가 많았다. 

아빠의 단단한 팔뚝과 어깨가 지나가고 나면

고통과 시원함이 함께 올라왔다 피부에 붉은 기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는 견딜만하고 심지어 시원하기까지 한 아빠의 때밀이가 어릴 적에는 어찌나 아팠었는지.

살갗이 찢어지는 아픔에 비명을 질러도 보고 살살해달라 호소도 했지만

이래야 때가 잘 밀린다느니, 조금만 참아보라느니 등 아무런 말 없이

아빠는 묵묵히 나와 동생의 등과 팔을 때밀이로 세차게 밀었다.

어느 순간 나는 아프다고 표현하기를 멈췄고

동생은 계속 아프다고 했다.


2.

스리랑카를 1년 갔다가 귀국하던 날

공항에서 날 마주한 엄마는 울었고 아빠는 나를 안았고 동생은 웃었다.

아빠의 등은 여전히 단단하고 동그랗고 매끈했다.


그 등을 뒤로하고 보낸 시간들이 왜 갑자기 주마등처럼 떠올랐는지 따져보기 전에

나는 아빠의 옆에 앉아있었다.

"노래 좋네."

"응 그렇네."

늘 그렇듯 대화는 많지 않았다.

"좋다 야. 이렇게 앉아있으니 좋네."

그 말씀이 괜히 흐뭇하여 나는 아빠 어깨를 살짝 주무르고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3.

저녁이 되었다.

엄마의 환갑여행 둘째 날 밤이다.

숙소에서는 여전히 음악이 나오고 아빠는 또 테라스에 혼자 앉아 계셨다.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검게 밤이 물든 바다를 보며.

아내와 잠시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작은 아빠, 작은 엄마와 함께 있던 아들이 말을 건다.

"할아버지 저기서 노래 불렀어."

테라스를 올려다보니 아빠가 가만히 앉아계신다.

잠시 뒤 거실로 들어가는 아빠를 보며 아들에게 답했다.

"그랬구나. 노래 어땠어?"

아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4.

다음 날 아침, 엄마 아빠와 동생네 부부를 먼저 공항에 데려다주었다.

가는 길에 아빠는 드물게 밝은 목소리로 이번 여행 참 좋았다 하셨다.

바다를 보며 마음이 참 편했다고.


숙소에 돌아와 아빠가 앉았던 테라스에 마련되어 있는 욕조에 물을 받았다.

아들이 거품목욕을 하며 노는 것을 보는데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

마음이 참 편했다는 말씀이 슬프게 되새겨졌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볍게 들썩이던 아빠의 등이 사실은 너무 외로워 보였더랬다.


아들에게 입욕제를 더 갖다 준다 하고 거실을 거쳐 욕실로 가는 사이 눈물을 다 흘려보냈다.

눈물은 흘러갔는데 아빠가 앉아있던 파란 의자가 보며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웠다.

푸른 바다는 어쩔 수 없어서 잠시 바라보다가 아들 노는 것으로 시선을 돌렸다.

슬픔이 거품 속으로 가라앉았다.


5.

한때 아빠가 당신답지 않게 식구들에게 노래방을 가자고 하던 때가 있었다.

회사에서 회식을 가면 한창 노래방을 가셨구나 싶은 때였다.

처음은 오랜만에 네 식구가 저녁을 먹은 날, 집 근처 노래방에 가자 하셨다.

노래를 잘 부르는 작은 아들 노래를 듣고 싶다 하시며,

큰 아들도 나름 부르지 않냐 하시며.

엄마는 당신은 안 가고 싶어 하면서 우리 둘을 아빠와 함께 가라고 밀었지만

아빠가 어색하고 불편한 나와 동생은 무슨 노래방이냐며

다음에 가자 하고 말았더랬다.


그다음부터는 술을 드시고 오면 노래방을 가자 하셨다.

박가네 가족모임에서도 노래방에 가자고 아빠는 강하게 주장하셨다.

가족모임에서 가장 큰 어른인 아빠의 의견을 존중하여 두 번 정도 노래방에 갔었다.

아빠는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할 수 없지만 느낌 있게 부르는 맛은 있었다.

처음 보는 아빠의 표현하는 모습이었다.

속에 있는 것을 술과 노래의 힘을 빌어 드러내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그 시간이 즐겁진 않았다.

잘 모르는 친척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진 않았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혼자 즐거워 보이는 아빠가 싫었다.

큰 어른이란 위치로 다른 사람들도 노래방에 데리고 가는 듯한 모양새가 싫었다.

노골적으로 다른 어른들 앞에서 그냥 집에 가자고 큰소리를 낸 적도 있었다.


이후로 몇 번인가 술을 드시고 집에 오셔서 노래방에 가자고 손을 잡고 끌 때

술을 드셨으니 그냥 쉬시라고 옷을 벗기고 눕히고 재우는데 온 힘을 다했다.

그렇게 두세 번 비슷한 일이 반복되자 아빠는 술을 줄이셨고, 더 이상 우리에게 노래방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6.

아빠는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바다를 보며, 

아마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에도 

아들과 나란히 앉은 그 날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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