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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Sep 18. 2023

사랑의 시제

그런 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서우가 내 핸드폰을 들고 만지작만지작 하더니 얼마 전에 찍은 자기 사진으로 바꿨다.

원래는 5살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통통한 서우 사진이었다.

약간 초점이 안 맞은 듯해서 서우가 안 볼 때 다른 사진으로 바꿔봤다.

더 어릴 때, 귀에 꽃을 꽂고 있는 깜찍한 사진으로 ㅎㅎ

그리고 다시 서우를 바라보는데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묘한 기분이 뭘까 하는데

아하!

어릴 적 찍었던 저 깜찍한 사진은 정말 깜찍하지만

지금의 저 서우와는 분명히 다르구나.


문득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얼른 서우가 바꿔줬던 사진으로 다시 바꿔놨다.

섬세한 우리 아들은 내가 바꾸는 걸 봤었는지

"아빠 나 어릴 때 사진으로 바꿨어?"

하길래 나는 짐짓 천연덕스럽게

"아니?"

하며 배경화면을 보여줬다.

으잉?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던 서우는

먹던 쌀국수를 후루룩 삼키고 해선장을 퍼 먹었다.




만약,

서우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 보통 내 입맛에 맞는 서우의 모습을 전제로 한다.

말을 지지리도 듣지 않거나

고집을 피우거나

하지 말라는 일을 계속하고 있을 때의 서우는

내가 사랑하는 서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용기를 내어 서우에게 사랑한다고 할 때,

불과 채 한 나절이 지나지 않은 나의 분노와 짜증은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장막 뒤로 숨는다.

언제고 이 장막을 찢고 나올 때를 기다리며.


나는 내 입맛에 맞는 서우의 모습을 잠깐 만난 것뿐인데

그동안 쌓아온 기억과 경험이 덮어쓰기가 된다.

이렇게 보면 그때마다 만났을 때의 서우가 나의 서우구나 싶다.




그러므로,

나는 서우를 사랑한다고 할 때

숨겨져 있는 어떤 조건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어제, 스스로 방정리를 척척하고,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준) 서우를 사랑한다.

나는 (4년 전, 통통한 볼살로 뒤뚱거리며 걷던 귀염뽀짝한) 서우를 사랑한다.


만약 조건 없는 사랑이 있다면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경지가

계속 계속 이어질 때 가능하겠지. (가능하겠냐...)




그리고,

서우와 우주에 대해 이야기하고 태양계 행성들의 크기와 우주의 크기에 대한 영상을 봤다.

그러다 별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는데

'하늘에 있는 저 별들은 사실 수십억, 수백억 년 전에 빛나던 게 지금 보이는 거야'

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저 별들은 수십억, 수백억 년 전의 것인데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나와, 서우와, 아내와, 봄봄이와 함께 있네?
그러면 결국 나의 바깥에 있는 것이 까마득한 과거의 것이든 1초 전에 만난 것이든 상관없이
내가 여기 있구나 하고 인식할 때나 의미가 있는 거네?

내가 사랑하는 서우가
어제의 서우든, 4년 전의 서우든
결국 지금 내가 끌어오고 있는 거네?
나한테 달렸네?


오호라.




그러니까,

봄봄아.


이 길고 어떻게 보면 쓸데없는 글자를 적어가며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은,

봄봄이 네가 언제, 어디에 있든

아빠는 너를 사랑하려고 노력할 거야.


나이가 몇 살이든, 

몸이 건강하고 아프든,

누구를 만나고 헤어지든,

아빠 말을 듣거나 듣지 않든,


너를 사랑한다는 아빠의 말이 

너에게, 그리고 아빠 스스로에게 신뢰를 잃어 빛바랜 화석이 될 때가 오더라도

아빠의 마음속을 자꾸 헤집어가며 다시 불을 붙일 거야.

사랑이 다시 무지갯빛으로 빛나며 춤을 추게 할 거야.


신뢰를 잃게 한 아빠의 행동도

빛나며 춤을 추게 한 아빠의 행동도

수십억, 수백억 년 전 별빛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는 것처럼

언제고 눈을 들어 바라보면 

거기에 사랑이 되어 빛나고 있을 거야.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하는

내 멋대로의 사랑이

우리 가족에게도 멋있는 사랑이 되도록 할 거야.


이 모든 것을 잊지 않으려 노력할 거야.

그게 바로 아빠의 사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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