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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Sep 30. 2015

생고기

2013년 3월 18일 뉴질랜드로 떠나는 친구와 함께

고깃집에 가면 으레 생고기를 먹는다. 삼겹살은 쫄깃하니 잘근거리며 씹는 맛이 일품이지만 바싹 익히면 튀김과자처럼 변해버리기 일쑤고 식으면 그리 입에 대고 싶지 않게 굳어버린다. 갈매기살은 얄쌍하니 길쭉한 모양이 입 안에 쏙 들어가서 고기결 따라 쉽게 분쇄되고 몇 번 씹으며 얘기하다보면 어느새 꿀떡 목구멍을 넘어가고 있다. 대체로 훌륭하나 다만 으적으적 씹는 맛은 아쉽다. 생고기는 두툼하니 씹는 맛이 있고 무던하니 다른 반찬들과 잘 어울린다. 불판에 잘 들러붙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떼어내어 뒤집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우처럼 한번, 두 번만 뒤집어줘야 하는 까칠한 고기와 달리 마구 뒤적여도 평타 이상은 치는 뚝심의 맛이 있다.


오랜만에 민웅이를 만났는데 고깃집을 가자고 한다. 메뉴는 바로 생고기. 비스듬히 불판을 올려놓고 김치와 부추, 콩나물, 버섯 등을 아래쪽에 놓은 뒤 고기에서 흐르는 기름에 적셔지고 불판 열기 받아 뜨거워진 김치와 부추, 콩나물, 버섯 등을 고기와 함께 곁들여 먹는 집이다. 소사역 횡단보도 하나 건너면 있는 집인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가게에 온지 6, 7년 되었다고 하니 장사도 꽤 되는 편이다. 가게는 한산하되 서넛 무리의 손님이 끊이지 않고 찾아온다. 머리를 깎은 민웅이의 모습은 23-4년 전 초등학교 입학할 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동네친구들 모두 모습이나 성격은 한결같다. 다만 삶의 궤적은 서로 달라서 하나 둘 동네를 떠나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 몇 년 전 인천으로 이사 간 뒤 얼마 전 결혼한 병호나 회사 때문에 서울에서 자취하다 역시 얼마 전 결혼한 용진이 그리고 크게 멀지는 않아도 동네에서 떠나 올 5월에 결혼하는 민근이를 빼고 민웅이와 나 딱 둘만 남아있다. 그런데 이제 민웅이도 떠난다. 뉴질랜드로 떠나는 민웅이는 특별한 일을 정하고 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대로 살면 평생 월급쟁이로 살 것 같아 떠나기로 결정했단다. 1년 정도 준비했고 함께 떠날 여자친구 부모님도 설득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당장 살 집과 일자리를 구하는  것뿐이라고. 꿈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얘가 내가 아는 민웅이가 맞나 싶다.


동네친구들은 각자 개성이 있는데 수더분하고 싹싹한 병호가 사람들 챙기고 모으면 용진이가 좋다고 어서 모이자고 한 다음 바빠서 못 온다고 하고 민근이는 가만히 있다가 그럴 줄 알았어라며 똑바로 하라고 뜬금포를 날리다 병호에게 욕을 먹고 나는 둘 다 시끄럽고 술/밥이나 먹자고 한다. 민웅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개그본능을 발휘하여 씨도 먹히지 않는 농담을 지치지도 않고 20년간 던져왔다. 그렇게 시답잖은 농담따먹기 하던 민웅이가 필리핀 어학연수를 갔다가 바로 호주 워킹을 간 일,  그때 만난 인연으로 영어교육 사업을 크게 했던 일, 사업을 하며 회사도 다니고 하루 4시간도 못 자며 살던 날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큰 물에서 놀고 싶다며 회사를 그만두게 된 여러 과정들을 얘기해주는데 나는 이야기에 빠져 눈만 끔벅이면서도 적당히 익은 생고기에 기름장 묻히고, 뜨끈하니 풀 죽은 김치 한 조각 올리고, 부추 한 젓가락 듬뿍 집고, 상추에 둘둘 말아 한 입에 넣고 볼이 미어지도록 씹었다. 씹어도 씹어도 질리지 않는 맛에 내 입과 손은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문득 보니 민웅이는 말도 하고 고기도 굽느라 입과 손이 바삐 움직인다. 


그러고 있자니 정말 뜬금없이 파란색에 노란 줄무늬가 있는 부원초등학교 체육복을 입고 브이자를 그리고 있는 땡그랗고 눈 둘레가 팬더처럼 까만 어린 시절의 민웅이가 떠올랐다. 생의 대부분을 우리는 같은 아파트에서, 두 라인 건너 살아왔구나. 두 라인이 그렇게 멀었던지 그렇게 얼굴 보기 어려웠구나. 이렇게, 같이 모여 농구도 하고 놀러도 가고 단체 미팅도 하던 우리가 어느새 서른이 넘고 결혼을 하고 각자 새 삶의 터전을 잡고 그렇게 각자의 길을 가고 있구나. 이렇게, 마주앉아 생고기 구워먹는 일이 마음 먹는다고 쉽게 되지 않는구나 이제는. 하는 생각이 파란 바탕에 노란 줄무늬 체육복을 입은 민웅이 얼굴로 바뀌면서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그렇지만 생고기를 우적우적 씹다가 줄줄 눈물을 흘리는 꼴이 내가 생각해도 우스워서 그냥 훅- 한숨 내쉬고 비스듬히 천장을 보며 눈물을 눈물샘으로 밀어넣었다.


내가 우동사에 들어갈 것이라는 이야기, 회사 일은 일이다, 인정은 받을만큼 일하지만 재미는 없다라는 이야기, 고기 맛있네 하는 이야기 등 시시콜콜하게 있다가 별일 없이 나왔다. 비가 내렸고 우산을 챙겨온 민웅이와 함께 쓰고 걸었다. 가방에 하나 더 있다고 했지만 귀찮다고 했고 내가 우산을 드는 게 아니어서 그러라고 했다. 민웅이와 내가 소사역에서 집으로 걷는 코스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나못지 않게 걸음이 빠르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 집 라인 앞에서 악수 한 번 나누고 가기 전에 연락하라는 말 한 번 하고 헤어졌다.


민웅이는 지금 옆옆 라인 같은 층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함께 먹은 생고기를 기억의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언제고 돌아와 다시 만나게 될 때 잘 숙성시켜 둔 오늘의 생고기를 꺼내어 뜨거운 불판에 치이익 올리고 턱이 뻐근하도록 김치와 부추 한 젓가락 상추에 둘둘 말아 우리네 인생살이를 맛있게 씹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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