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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Sep 30. 2015

콩나물국

2012년 12월 8일의 마음결

겨울이다. 내게 겨울이 왔음을 알려주는 몇 가지가 있다. 일단 추위. 낮에 해는 따갑고 바람은 선선한 가을이 지나면 해는 따뜻하고 바람은 쌀쌀한 늦가을이 온다. 은행잎은 바닥에 금빛 잉어로 펄떡이고 플라타너스 잎은 데굴데굴 구르며 구둣발에 사라락 감긴다. 투명한 감처럼 빛나는 단풍잎은 빛을 뿌리고 깊은 색을 얻는다. 그러다 금빛 잉어가 바다로 돌아가고 구둣발에 감긴 잎이 한데 모여 연기로 화할 때, 붉은 물이 빠지며 단풍이 금풍이 될 때, 해는 열을 잃고 바람은 날이 선다. 얼굴에 와 부딪히는 몽골, 시베리아 벌판의 씽씽한 공기 입자가 사납다.

슬슬 내복 생각이 나고 목도리를 찾는다. 타자를 치는 손은 곱아들고 구두 속 발은 옹송그린다. 


다른 하나는 창이다. 영하 10도쯤 되거나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창은 꽃단장을 한다. 눈이 온 것도 아닌데 몽골, 시베리아 벌판의 씽씽한 공기 입자가 반짝거리는 옷을 입혀준다. 서리옷을 입은 창은 훌륭한 미술작품이다. 그 자체로 은근하고 포근할 뿐 아니라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 또한 아름답다. 한밤중 가로등은 동글동글 주황색 민들레 풀씨가 되고 뜨는 햇빛은 아지랑이처럼 아련하면서 이불처럼 집 안 거실을 덮는다. 


달빛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음식들.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음식은 많다. 뜨끈뜨끈 말랑말랑 호빵을 집고 앗뜨거 손을 몇 번 방정맞게 놀리면 이보다 훌륭한 손난로가 없다. 한 입 딱 물었을 때 푹신푹신 잘근잘근 씹히는 흰 빵과 살짝 딸려오는 모락모락 달큰한 검은 팥의 조화가 행복하다. 게다가 한 입 베어물고 속을 훤히 드러낸 호빵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그야말로 겨울 그 자체다. 남은 일은 겨울 그 자체를 입 안에 넣고 입천장이 데지 않도록 이리저리 굴리고 호호-거리며 발도 종종-거리며 으허허 서로 웃으며 겨울이 되어가는 것이다.


오뎅은 어떤가? 칼바람에 치이고 얼음길에 발길을 차이며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길 때 뿌연 김이 가득한 포장마차는 밥을 막 짓고 뚜껑을 연 솥처럼 넉넉하고 뜨끈하다. 몇 개 주세요 어쩌고 할 필요도 없이 누구는 냉큼 막대기 하나 집어들고 누구는 종이컵 들어 국물 퍼나르고 누구는 종지그릇 내어 간장을 따른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에서 오는 기쁨도 잠시 한 입 베어 문 오뎅이 주는 뜨거운 기운을 미처 감당하지 못하고 호호-거리며 차마 입도 다물지 못하고 쩝쩝 씹어먹는다. 그 어떤 술보다 오뎅국물 한 모금에 크아-, 어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렇게 다시 사나운 칼바람과 얄미운 얼음길에 맞설 기운을 얻는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내게는 콩나물국이 제일이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에 먹는 콩나물국은 뭔가 아쉽다. 콩나물국 특유의 시원하고 살짝 매콤한 그 맛은 오로지 겨울을 위한 것이다. 매콤한 맛은 첫 모금에 온다. 입술을 적시고 혀 끝에 닿는 국물에서 나는 맛이다. 대개의 콩나물국은 여기까지는 맛을 낸다. 그러나 결정적인 부분은 그 다음이다. 좋은 콩나물국은 혀 끝을 거쳐 혀뿌리와 입 안쪽을 지나고 목구멍을 향해 나아갈 때 입 안에 그윽하고 시원한 풍미를 남긴다. 그리고 목구멍을 넘어가면 국물만 마셨는데도 묵직한 무엇인가 쑤욱 내려간 듯한 일련의 통쾌함과 개운함이 있다. 이런 통쾌함과 개운함을 느낀 목구멍은 자꾸 다음 번 국물을 재촉하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밥 한 그릇은 뚝딱이다. 밥을 먹기 위해 콩나물국을 먹는 게 아니라 콩나물국을 먹기 위해 밥을 먹는다. 매콤한  첫맛은 무척 중요하지만 통쾌한 끝 맛이 없다면 싱거울 뿐이다. 자극은 있되 기쁨은 없다.

자극 뒤에 있는 다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매콤한 맛을 내려면 고춧가루를 뿌리거나 고추를 송송 썰어 넣으면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콩나물의 맛이 우러나올 수 있도록 잘 끓여야 하고 나는 알 수 없는 엄마의 비법을 따라야 한다. 물론 엄마의 비법은 알려준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그러니까 내게 겨울이 왔다는 건 콩나물국을 먹는다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진국을 찾고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해 가만히 내 안을 들여다본다는 것, 그리고 다른 이의 비법이 무언지 듣고 나누는 것, 그것을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어떻게 찾고 써왔는지 나누는 것, 앞으로 어떻게 찾고 써갈 것인지 나누는 것, 사나운 칼바람과 얄미운 얼음길을 뜨끈한 기운 나누며 함께 보내는 것. 일단 만나서 밥 한 끼, 국 한 그릇, 술 한 잔 나누는 것이다.


그러니까, 함께 겨울을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겨울을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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