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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Sep 30. 2015

검은 색인 줄 알았던 것이 흰 색이라는 걸 알았을 때

검은색의 어떤 물건이 있다. 너나할 것 없이 검은색이 떠오르지 않으면 누구나 이 물건의 이름을 댈 만큼, 검은색의 대명사, 검은색 그 자체인 물건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물건이 사실은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처음엔 믿기지가 않아 의심스럽다. 이제껏 몰랐다는 것이 두렵고 심지어 그런 사실을 밝힌 게 밉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물건이 흰색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흰색인 줄 알았다. 새로운 것을 알았다. 그리고 새롭게 알았다는 벽에 갇힌다. 흰색인 줄 몰랐던 것은 사라지고흰색인 줄 안 것만 남는다. 검은색인 줄 알았던 것이 흰색이 된 것처럼 흰색인 줄 알았던 것이 또 다른 색이 될 수도 있다. 이 물건은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다 라고 하는 순간 물건은 흰색에 갇힌다. 나중에 다시금 흰색이 아니라 실은 셀 수 없는 여러 색의 스펙트럼이라고 했을 때 '아, 여러 색의 스펙트럼이라는 걸 알았다!'라고 하는 만큼 세계는 좁아진다. 안다고 하는 벽 너머에 있는 무한대의 모르는 세계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무엇인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아는 것을 쌓아가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일이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좁고 답답해진다. 끊임없이 모를수록 넓어지고 자유로워진다.


위 내용과 조금은 다른(그렇지만 연결이 되는) 친구의 실생활 사례가 있다. 

남편과 함께 알탕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메뉴판을 보니 알탕과 알서더리탕이 같은 값이다. 뭔가 서더리탕이 하나라도 더 있을까 싶어 알서더리탕으로 주문한다. 그런데 막상 나온 것을 보니 생선 뼈만 있고 먹을 건 거의 없다. 남편이 말한다.
"왜 이건 뼈밖에 없지?"
"글쎄 너무 흐물흐물해졌나?"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이런 집에서는 회를 3마리 시키면 2마리 정도+@로 살 주고 뼈도 2마리만 한 다음 남은 1마리로 이렇게 한다던데."
"그래?"
"그런 거면 우리는 남이 먹다 남은 뼈 국물을 먹고 있는건가? 왜 똑같은 돈 내고 이렇게 먹어야 해?"
슬슬 짜증이 난다. 이 남자는 도대체 왜 이렇게 따지는 걸 좋아하는 걸까.
"그래 이렇게 알았으니 다음엔 잘 골라서 먹자"
라고 마무리한다. 


여기서 화가 난 이유는 간단하다. 식당에서 알탕과 알서더리탕의 가격이 같은 것은 이유가 있다. 장사꾼은 손해 볼 가격을 써놓지 않는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가격이 같다는 것은 서더리가 별 볼일 없다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알았다면 대화의 양상은 달라질 수 있다. 남편이 따질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메뉴판을 보고 무심히 지나쳤다. 하나는 알탕이고 다른 하나는 알탕+@인데 왜 가격이 같지?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 그러니 왜 가격이 같은지 모르는 것은 묻혔다. 몰랐다면, 물었을텐데 모르는 지도 몰랐다. 순식간에 알아버려서 지나갔다.


찰나와 같이 스쳐가는 의문, 모르는 것과의 만남을 나는 얼마나 많이 지워버렸을까? 모르는 것을 얼마나 자주 알아버렸을까? 나는 대체 지금 얼마나 좁아져있을까? 그리고 동시에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넓어질 수 있을까?

나는 얼마나 자주 모를 수 있을까?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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