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는 것과 있는 그대로 하는 것
지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다음카페에 들어가며 무심코란 말이 떠올랐다.
왜 떠올랐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무심코 무심코란 말을 떠올렸다.
카페에 들르는 마음은 무심하지 않은데 뭘까?
사실 조금 더 가만히 있다보면 이리저리 뜨는 생각, 감정들이 가라앉고
왜 이런 저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뭔가 있어보이는 글을 써서 반응을 얻고 싶은데 무심코란 말이 떠올라 엮는 중이다.)
다만 그 행동을 모른 척 하고 싶거나, 모른 척 하는 걸 다시 한 번 척하며 정말 그런 줄 아는 때가 많다.
척하는 데서 오는 주위의 반응은 달콤하다.
달콤한 반응이어서가 아니라 의도했던, 기대했던 피드백이 오는 것이 달콤하다.
아픈 척, 괜찮은 척, 기쁜 척, 슬픈 척, 화난 척, 멋있는 척을 할 때마다
걱정, 격려, 시기와 질투, 위로, 분노, 수그러듬, 경멸 등의 반응이 오고
그 반응을 자양분 삼아 척 하는 맛을 들인다.
끊기 힘든 이 맛이 지금의 나를 순간순간 쌓아왔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런데 무심코, 상대가 척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어떤 반응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음. 뭐랄까.
나는 척 하는 지점을 찌르고, 비집고 들어간다.
분명 안 괜찮아보이는데 괜찮다고 하면 굳이 너 안 괜찮아 보인다고 말하고 싶다.
슬프지 않은 몸짓으로 슬픈 척 하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어준다.
멋있는 척 하면 흠을 찾거나 과거의 찌질한 모습을 떠올려 지적한다.
상대는 당황하고 무안해하며 화를 낸다.
그리고 나는 그런 반응을 즐긴다.
그러나 내가 척 하는 부분을 누군가 비집고 들어오면
그게 그렇게 싫을 수 없다.
그에 대한 대비책은 아예 그렇게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도록
완벽하게 척 하는 것이다.
척 하는 줄 모르게, 원래 그런 것처럼 보이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그래서 척 하는 것을 생각으로 덮기보다 직접 행동하며 덮는다.
행동을 하면, 상대는 내가 정말 그런 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도 그런 줄 알게 된다.
찌르고, 비집고 들어가는 것을 보면 척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나는 척하는 것을 좋아한다.
상대가 척하는 것을 갖고 노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내가 척하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여러가지를 꾀하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나'를 심어가는 것을 즐긴다.
중독이다.
척하는 것에 중독되지 않아야 할 필요는 없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없다.
이런 게 오히려 사는 맛, 사람다운 것이고 그런 가운데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조화, 공동체일 수도 있다.
다만 척하는 것 말고, '있는 그대로'라는 게 있다는 걸 알면 선택할 수 있다.
원래 그렇다고 여기지 않고
이런 것이 있다, 또 저런 것도 있다는 것을 알고
선택해나가는 것이다.
선택해나간다는 것을 알면 된다.
척하는 건 달콤하고
있는 그대로 하는 건 시원하다.
또 척하는 건 끈적하고
있는 그대로 하는 건 껄끄럽다.
직접 맛을 보아가며 고르면 된다.
더 좋은 맛을 미리 정하지 않고 직접 해보면 된다.
이렇게 뭔가 있어보이는 척을 해 봤다.
이미 달콤하긴 한데 피드백에 따라 질척거릴지, 쿨할지 모르겠다.
모른다고 하지만 무심하진 않다.
유심코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