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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Sep 30. 2015

부추

2012년 8월 29일의 마음결

가을 하늘은 야속한 여자다. 적어도 하루종일 빌딩 안에 있다가 6~7시 사이에야 비로소 하늘 볼 여유를 갖게 되는 직장인에게는 꼭 그렇다. 오늘도 어김없이 가을 하늘은 은은하게 빛나는 주황색 치마를 걷어버리고 쌩하니 먼지같은 구름만 남겨놓았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이 야속한 여자 같으니. 그렇지만 칼퇴하는 저녁은 아름답다. 나는 오늘도 달린다.


"엄마 오늘은 안 가?"

"응 오늘은 허리 아파. 병원 갔다왔어"

ㅠㅠ

혼자 걸으니 속말이 많아진다. 애써 주변에 있는 것들에 집중한다. 태풍이 후려치고 간 풀들이 데구루루 땅에 구르고 있다. 어깨죽지에 올려놔도 넉넉할 새끼 고양이가 사뿐사뿐 소리내며 지나간다. 비 온 뒤 퍼지는 풀냄새가 슴슴하다. 오늘은 정말 열심히 뛰었다. 정말 열심히 뛰려면 무릎 밑에만 맡겨선 안된다. 허벅지가 당겨주고 엉덩이가 밀어줘야 한다. 어깨가 버텨주고 팔이 굴러줘야 한다. 허리가 균형을 잡아주고 턱이 방향을 가리켜줘야 한다. 폐가 숨 담아주고 심장이 용 써줘야 한다. 온몸 구석구석 으쌰으쌰해야 열심히 뛸 수 있다.


그렇게 뛰고 나니 정말 녹초가 됐다. 터덜터덜 후들후들 집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점심에 먹은 순대국 생각이 났다. 안산 반월공단 어디쯤에 있던 순대국집. 순대는 실하고 다른 부위 고기들은 푸짐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던 부추 한 접시. 평소에 딱히 부추를 좋아해 본 적은 없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먹으면 몸에 좋다고, 먹으라면 제발 먹어봐라 다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다라는 수많은 음식 중 하나일 뿐 크게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부추를 듬뿍 넣어 먹고 싶었다. 그래서 반찬그릇 절반을 다 국에 담았다. 그리고 푹푹 퍼 먹었다.


여전히 맛은 몰랐다. 왜 터덜터덜 후들후들 집으로 가는 내가 점심에 먹었던 부추를 떠올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자꾸만 뜨거운 국물에 잠겨 있던 부추가 떠올랐다. 숟가락에 걸쳐 있던 부추. 뜨거운 김에 축 늘어져 있던 부추. 그런데 입에 들어간 부추는 만만하지 않았다. 후루룹 입에 넣으면 스르르 녹아버리는 배춧국 속 배추나 혀로 지그시 누르면 살포시 으깨어지는 감자국 속 감자나 땡땡하던 몸뚱이가 풀려 질근거리는 콩나물국 속 콩나물과는 다른 부추만의 강단이 있었다.


꼿꼿하던 몸이 후줄근해졌어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열심히 어금니로 으깨보려해도 잘 갈리지 않는다. 나는 그저 다른 것들과 함께 부추를 삼킬 뿐이었다. 나는 축 처져 있던 몸을 추스렸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부추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팔팔 끓이면 끈적해지는 다시마 같은 사람은 되기 싫다고 생각했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잘 씹히지도 않지만 제 몸을 풀어헤치고 녹이는 열기 앞에서도 꼿꼿함 잃지 않는 부추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때론 까다롭고 고집스럽지만 피 맑게 해주는 청명한 부추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부추같은 사람을 만나도 좋겠다고 바랐다.


야속한 가을하늘은 벌써 머리 꼭대기까지 밤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연애하느라 바쁜 풀벌레들은 싱싱한 부추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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