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미 Sep 30. 2015

나쁜 남자

2012년 8월 27일의 마음결

가을은 하늘부터 온다. 바람보다, 냄새보다 먼저 하늘로 온다. 오늘은 나름 칼퇴했고 시간이 남았고 하늘은 가을이어서 뛰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에 들어서니 어김없이 엄마가 계신다. 옷을 휘적휘적 벗어 던지고 바로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어디 가?"

"달리기 하러"

"어디로?"

"산새공원~"

"나도 같이 가자"

"그래"

사이좋게 길을 나선 모자.

"오늘 하늘 진짜 예쁘네"

"응"

응이라니! 그것 뿐이오? 엄마는 어째 아들보다 낭만을 모르시오! 라고 말할  뻔했다. 아직은 착한 남자. 말을 삼키고 앞을 보니 서울신대생 남학생이 하늘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있다. 흐뭇하게 지그시 웃어주고 싶었으나

얼굴도 옷도 위아래도 다 시커먼 남자가 자길 보고 웃는 걸 안다면 분명 하늘이고 뭐고 기분이 안 좋아질 것 같아 속으로 웃어주었다. 그도 가을을 만끽할 권리가 있나니.


그렇게 골목에 접어서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더듬더듬 지팡이로 길을 찾는 할아버지 발견. 앞이 안 보이시는구나. 차 타고 가던 아주머니한테 길을 묻는데 아줌마가 뭐라 설명하다가 날 보고는 

"이 할아버지 길 좀 안내해주세요"

"네~"

할아버지는 말을 시작했다.

"아, 오늘 원래 운동하는 날인데, 나 자주 운동하거든. 근데 우리 집은 경로당 쪽이야. 지금 여기쯤 하수도 구멍이 있을 것이여."

"없는데요"

"없어? 아닌데 왼쪽에 보면 샤시문이 있을 거여. 왜 그 슈퍼 지나서 있는 거 말야"

"슈퍼 아직 더 가야해요."

한창 착한 청년 노릇을 하는 내게 엄마가 외친다.

"그 할아버지 이 동네 사람이야. 길 잘 알아!"

"아이, 엄마는! 그냥 먼저 가!"

"@#$@%@#%$!#%$$%"

뭐라 외치는 엄마의 야속한 표정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착한 청년 노릇에 열중했다. 할아버지는 끝없이 말했고 나는 끝없이 대꾸해주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고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청년 누군가?"

"네 그냥 아무도 아니에요. 살펴 들어가세요"


그리고 돌아서는데 아차! 우린 둘 다 핸드폰을 안 들고 왔다. 산새공원을 가는 갈래길은 적어도 서너갈래. 나는 뛰기 시작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분명 엄마가 마지막에 어디로 간다 했던 거 같은데.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뭐라고 엄마를 내팽개치다니.. 이런 나쁜 놈. 아이를 잃어버렸을 때 이런 느낌일까. 나는 점점 더 빨리 달렸다. 엄마 걸음이라면 따라잡고 남았을 거리에 왔는데도 엄마가 안 보인다. 마음이 초조해진다. 어떡하지? 다시 집으로 가볼까? 부원 초등학교 쪽으로 갔어야 하나?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저 어두운 골목에서 짙은 형광 핑크색 티가 둥둥 떠 온다. 나는 기뻐서 엄마한테 막 뛰어갔다.

"아들, 길은 저쪽이야"

길 나도 알거든요? 흥. 


흥이나마나 엄마를 극적으로 만난 게 신기하고 반갑기도 해서 공원까지 천천히 걸었다.

"그 할아버지 아줌마들이 엄청 싫어하는 사람이야"

"왜"

"앞도 다 보여. 그런데 괜히 저러는거야. 지나가는 아줌마한테 이상한 소리나 하고"

"나한테는 친절하던데?"

"아니야 아무튼 그래. 다들 할아버지 싫어해."

"말 엄청 많이 하던데? 외로우신가봐."

"외로우면 사람들한테 잘 해야지. 동정이나 사려고 안 보이는 척 하고 말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게 아닐까?"

"응 그렇네"

가끔 날 당황스럽게 하는 이 돌연한 긍정. 이상하다. 나 맞는  말한 거 같은데 부끄러워.


이러니저러니 공원 도착!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져 살짝 앞으로 나섰다.

"엄마 여기 길 다 아니까 먼저 가려면 먼저 가"

"응"

망설임없이 앞으로 쭈욱 나서서 휘적휘적 가다 돌아보니 아차 싶다.

'저놈 새끼는 기껏 엄마랑 간만에 산책 와 놓고는 먼저 가란다고 먼저 가?'

라고 힐난하는 표정을 본 것도 같다. 그런데 그냥 계속 빨리 갔다. 엄마 찾아 뛸 때는 언제고 참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언덕을 오르는데 뒤에서 엄마가 부른다.

"그냥 이 공터에서 뛰면 안돼?"

"응 안돼"

보나마나 '저놈 새끼는!' 하는 표정일까봐 뒤도 안 돌아보고 운동장으로 갔다. 으악, 난 정말 나쁜 남자야.


드디어 운동장 도착! 몸을 풀고 한껏 들뜬 마음에 달리기 시작한다. 이 세상이 다 내 것 같고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 좋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참 뛴 것 같은데 아직 5분도 안 됐다. 오늘 30분은 뛰어야지 하고 왔는데 이럴수가. 아무리 뛰고 또 뛰어도 시계가 가지 않는다. 저거 분명히 고장난 거야라고 의심할 즈음 어느 새 트랙을 돌고 있는 엄마 발견. 엄마가 내가 뛰는 걸 보는 건 아마 초등학교 운동회 이후로 처음일 거다.  그때의 내가 아니란 걸 보여주겠어! 라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뛰기 시작, 그런데 여전히 시간이 안 간다. 죽겠다.

"아들, 오늘 한 시간 뛸 거야?"

"......... 아니... 그렇겐 못 뛰어...."

아무리 그래도 15분은 뛰어야 해! 정말 힘들게 힘겹게 뛰다가 내가 왜 이렇게 괴로워하면서까지 뛰어야하나 

다 놓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즈음

"아들, 엄마 먼저 갈게. 힘드니까 조금만 더 뛰고 와~"

"응~!! 알았어~!!!!"

오늘 들어 처음으로 엄마에게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엄마.


내가 잘 뛰는 걸 보여줄 사람이 없자 몸은 더 가벼워지고 다리는 바람을 탄다. 더 이상 못 뛸 것 같았는데 전력질주 2바퀴 뛰고도 힘이 남는다. 아마 마지막에 착한 아들이 되어서 그런가보다. 몇 번 나쁘긴 했지만 한 번은 착했으니 난 나쁜 남자긴 해도 못된 남자는 아닐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부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