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미 Sep 30. 2015

어떤 남자

2011년 9월 11일의 마음결

그는 부유한 집의 아들이었다.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했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에겐 다른 세명의 형제들이 있었지만 유독 그만 그렇게 먹고 마시며 한량처럼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지금은 냉면으로 유명하지만 조선시대 태종이 태조가 환궁하길 바라며 보낸 차사들이 가는 족족 돌아오지 않았다는 무시무시한 민간의 속설을 자아낸 함흥에서 태어나 자랐다.


태조의 고집이 그 땅에 서려서인가 그의 아버지 역시 무척 완고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세월이 지나면서 평양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고무신 등을 취급하는 도매상을 차렸는데 나름 장사가 꽤 잘 되었다. 당시 짚신도 변변하게 신지 못하던 시절이었음을 생각하면 고무신 도매상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돈이 많을 뿐 아니라 학식도 있었다. 마을에서 어떤 행사가 있을 때면 그의 아버지를 찾아와 글자를 물었고 그를 비롯한 형제들은 옛 성인들의 글을 배워야 했다. 유독 형제들 중 그만 바깥으로 나서게 된 것은

풍족한 생활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권태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는지 고루하고 답답한  옛사람들의 글과 완고한 그의 아버지를 피하기 위함이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일본군에 징집되어 필리핀 전선 어딘가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모든 전쟁은 발발하게 된 계기나 목적에 관계없이 인간성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파괴하는 것이고 그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면의 큰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작전수행을 위해 뗏목을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던 중 그의 부대는 적의 공격을 받아 산산이 부서졌고 그를 비롯한 동료 수십 명은 뗏목의 잔해를 의지해 태평양 바다 위에서 하릴없이 표류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고 몇 명의 동료가 지쳐 바다 속으로 깊은 잠을 들러 떠났고 다시 하루가 지나서 몇 명의 동료가 갈증으로 바닷물을 떠 마시다 더 큰 괴로움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지옥같은 하루하루가 어느 덧 열흘이 될 때까지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초인적인 의지로 무엇을 위해 살아남았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동료들이 한 명 한 명 죽어가는 장면을 지켜보았을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가 대동아전쟁이 끝나고 패망한 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결혼하고 첫 아들을 낳은 뒤 다시 한국전쟁에 징집되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전해지는 바는 없다. 다만 그는 여전히 술을 마셨으며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술을 마실 때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쥐어뜯었다는 것이다. 딱지가 내려앉을 만하면 다시 뜯겨져버리는 상처를 안고 그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틀어, 세계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봐도 두고두고 후세에 남을만한 비인간적인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나고 무수한 시체 위에서 그는 다른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든 살아보려 노력했다. 그러다 운 좋게 그 당시에는 꽤 괜찮은 직업이었던 운전수를 하기도 했다. 무수한 학살의 땅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만 했으나 그러나 그 기적은 상처를 다 낫게 해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그때의 기억은 또렷해져갔다.


그는 술을 마실 때면 으레 그의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처음 듣는 이름들을 부르며-아마도 같은 뗏목을 탔던 동료들을- 울곤 했다고 그의 아들은 회상한다. 그는 그의 아들이 중학교 3학년이던, 48살의 어느 날 상처를 달래주던 술이 준 간경화를 안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그의 아내가 생계를 위해 매일같이 보따리 장사를 하며 4명의 자식을 근근이 키워나가야 했던 시절의 시작이었다. 또한 그 지역에서 머리 좋은 아이들만 시험을 쳐서 들어가야 했던, 합격소식을 듣고 그의 아버지, 그러니까 그 아들의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렸다던 인천중학교에 당당히 합격한 그의 첫째 아들이 마침내는 생계를 위해 대학을 중퇴해야만 했던 가난의 뿌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너무나 거대한 시대의 아픔을 원치않게 짊어질 수밖에 없던 수많은 청년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그의 아들 자신도 비슷하게 어려운 시절을 보낸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살기를 바랐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배고픔, 고됨, 억울함. 그래서 그의 아들은 자식이 결코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아들은 1983년 10월 5일 오후 4시 15분 경, 첫째 아들 박재현을 낳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할머니 보내드리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