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관심 #02
기대와 관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전제할 것은 기대나 관심이나 둘 다 맞고 틀림,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기대하고 누구나 관심을 갖는다.
기대는 누구나 다 아는 그 말이 맞다. 상황이 이러저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덧붙여보면 기대란 상황이 실제로 어떤지 알아보지 않고 이러저러하기를 일방적으로 바라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다.
아주아주 거칠고 대략적인 예를 들어보자. 김보통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있다. 보통 씨는 태어난 순간 아들이 된다. 자라며 친구가 되고 동생이 나오면 오빠나 형이 된다. 학교에 들어가서 학생이 되고 선후배가 된다. 취직한 뒤 부하직원이 되고 상사가 된다. 자식을 낳으면 아빠가 되고 형제자매의 아이가 태어나면 삼촌이 된다. 자식이 아이를 낳으면 할아버지가 되고 잘하면 증조할아버지까지 될 수도 있다. 승진해서 임원이 되면 상무님, 전무님이 되고 창업하면 사장님, 교직에 서면 선생님, 길거리에서는 아저씨가 된다. 살아가는 과정과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남자의 이름은 점점 늘어난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 씨에게 자기 자신은 보통 씨다. 살아오며 붙은 수많은 이름이 보통 씨 안에 있다. 보통 씨 자신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 그에게는 정일반이라는 아내가 있다. 그런데 연애하며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고 내조를 아끼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내는 내가 알던 아내가 아니다. 늦잠을 자느라 아침을 챙겨주는 건 고사하고 설거지는 항상 쌓여있다. 시부모님께 좀 더 살갑게 대했으면 좋겠고 아이들 교육은 잘 시키고 있는지 의문이다.
정일반 씨는 어떨까? 연애하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할 것 같았던 남편은 오로지 자기만 챙기기 바쁘다. 주말에는 누워서 TV만 보거나 잠을 자기 바쁘고, 아이들과 놀러 갔다 오라고 해도 귀찮다며 짜증을 낸다. 시부모님 챙기라고 요구할 줄은 알면서 먼저 나서서 장인 장모 챙기는 걸 본 적이 없다. 아이들 교육에 대해 의논하고 싶은데 집에 있는 사람이 그런 것도 못 챙기냐며 면박을 주기 일쑤다.
세상의 많은 김보통 씨는 세상의 많은 정일반 씨를 '아내'로 부른다.(반대도 그렇다. 이 밑으로도 쭉) 그러나 정일반 씨는 위에 적은 김보통 씨처럼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정일반 씨 자신의 세계에서 아내라는 이름은 비중이 아주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세상에 100% 아내인 사람은 없다. (계량적으로 나타내긴 어렵지만) 만약 정일반 씨가 스스로 10% 정도의 비중을 아내로 두고 있다면 김보통 씨는 정일반 씨의 10%만을 보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김보통 씨의 '아내'와 정일반 씨의 '아내'가 같은 의미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위의 내용만 보면 김보통 씨에게 아내는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고 내조를 아끼지 않으며 부지런한 아침형 인간으로서 산뜻한 앞치마를 두르고 신선한 아침을 차려낼 뿐만 아니라 뒷정리까지 깔끔하고 시부모님께 애교도 부릴 줄 알고 아이들을 사랑과 관심으로 키우는 사람'이다. 정일반 씨의 남편은 '주말에 항상 가족과 함께 어딘가로 떠나는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고 아이들과 노는 걸 무엇보다 좋아하며 장인장모를 자기 부모보다 더 잘 챙기는데다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미래를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다.
보통은, 일반적으로 '아내'나 '남편'이 무엇인지 대화를 나누는 커플은 없으므로 김보통 씨의 '아내/남편'과 정일반 씨의 '아내/남편'이 서로 만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보통 씨는 대개 자기 세계의 '아내'라는 안경을 쓰고 정일반 씨를 바라보므로 아내의 감정, 생각,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간혹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자기의 인식에서 해석한 것이다. 정일반 씨의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10%일 수도 있는 '아내/남편'을 두고 우리는 100%의 '아내/남편'을 기대한다. '아내/남편'(이)라면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부부 사인데 이럴 수 있어? 그게 어떻게 그런 말이야? 기대하면 할수록 벽은 높아지고 상대와의 거리는 멀어진다.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안되고, 맞춰보려 해도 몇 번 하다 성질이 나서 못한다. 그러다 결국 포기한다. 상대가 나를 이해해줄 거라는 희망을 버리고 나는 나대로, 상대는 상대대로 살게 된다. 포기한 나머지 부분만큼, 딱 그만큼만 산다.(끊임없이 기대하며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 살기엔 오히려 편하다.)
상대가 답을 내지 못하는 것은,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답을 정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의 바람(100% 아내/남편)에 맞춰주길 바라는 순간부터 나는 나의 바람/기대에 갇힌다. 나의 '아내/남편'에 부응해 줄 것을 정하고 물었기(요청했기) 때문에 거절당하기 쉽다. 또 비참하다. 내가 명색이 '아내-남편'인데 이것도 답을 얻지 못하다니. 그래서 몇 번 시도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포기한다. 연애할 땐 차 버리고 결혼한 뒤에는 체념한다. 만약 요청을 들어주면 더 빠르고, 강하고, 의심없이 기대하게 된다. 이것도 됐는데 저거는 왜 안돼? 할 수 있는데 왜 안 하는 거지? 점점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건지 전전긍긍하게 된다. 불만, 불안, 집착이 뜬다. 상대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자신의 벽은 점점 높아져만 간다. 그나마 있던 10%의 '아내-남편'의 비중은 점점 쪼그라든다.
누구나 다 이렇게 산다. 아내/남편을 다른 모든 관계로 치환해도 그렇다. 그러나 다르게 사는 길도 있다. 차 버리기 전에, 체념하기 전에 상대가 정말로 왜 저러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하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100% 아내/남편'이란 안경을 벗는 순간, 진실된 '왜?'-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기대와 관심 #0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