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미세먼지가 짙게 끼었다. 보이지 않는 낱개의 먼지들은 보이던 사물들을 점점이 가렸다. 아침부터 밤까지, 해가 뜨고 달이 질 때까지 빛과 어둠을 촘촘히 가렸다. 빛은 먼지에 부딪혀 동그란 모양을 냈고 어둠은 동그란 빛을 동그랗게 감쌌다. 밤안개의 축축하고 선선한 기운일까 싶어 한 숨 들이마시다 컥컥 잔기침을 해댔다. 목이 칼칼했다. 몇 시간 전 마신 맥주가 쓸어내린 식도에 미세먼지가 점점이 박혔다. 점점이 박힌 미세먼지는 식도뿐만 아니라 기도에도 침투하여 폐에 쌓이거나, 눈의 점막에 내려앉아 스미거나, 콧구멍 속 털을 헤집고 들숨을 따라 빨려 들어오거나, 귓구멍, 땀구멍 등 모든 구멍을 통해 알 수 없는 여러 방법으로 내 몸속에 들어와 머무르거나 체액을 타고 이리저리 흐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동그란 가로등 빛과 동그라미가 빠진 어둠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싶어졌다. 점점이 박힌 미세먼지가 글자가 되어 흘렀다. 그러나 글자는 미세먼지와 달리 내 몸에 머무르지 않고 이내 흘러가 사라져갔다. 그러나 동그란 가로등 빛과 동그라미가 빠진 어둠을 바라보는 동안 글자는 끝없이 솟아나왔다. 나는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이야기의 세계라고 할까, 글의 세계라고 할까.
이 세계의 문은 어제처럼 풍경이기도 하고, 어떤 작가의 책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모양은 매번 다르지만 감각은 비슷하다. 몸은 사라지고 머리 위에 다락방 같은 공간이 생기는데 그곳에 마음을 두면 문고리가 생기고 경첩이 달린다. 문이 보이면 문을 열거나 열지 않는다.
문을 열면 원래 살던 세계와 같지만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냥 그렇게 살던 것이 그냥 그렇게 살아지지 않고, 원래 그러던 것이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게 된다. 답이 사라지고 질문이 나타난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멈춘다. 재미보다 재미있는 무엇, 지금까지 맛 본 모든 맛보다 더 맛깔난 무엇이 있다.
문을 열지 않으면 머리 위 다락방 같은 공간은 풍선 바람 빠지듯 쪼그라든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되지 싶어 그대로 둔다. 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 문은 다시 오지 않고 그 문 너머의 세계는 영영 만나지 못한다. 엄마와의 시간, 아내와의 공간이 흘러간다. 문을 열지 않은 채 지내다보면 흘러가는 시공간을 바라보지 못하고 흐름에 잠긴다. 일상에 젖어든다. 그냥 그렇게 사는 세계, 원래 그러던 세계, 질문이 사라지고 답이 나타나는 세계에 산다. 마우스를 클릭하고 휠을 내린다. 뒤로 가기를 누르고 창을 닫는다. 채울수록 허전한 그릇을 빚는다. 선반 가득 빈 그릇이다.
어제는 문을 열었다. 만난 지 10년이 넘은 모임의 친구들은 그날따라 20대 초반의 기세로 놀았다. 남편과 남편이 될 사람들이 서울-수도권 각지에서 왔다. 맥주잔은 계속 돌고 생일축하 노래도 3번을 돌았다. 산발적으로 터지는 말은 서로 부딪히지 않고 자유롭게 춤을 췄다. 2004년 여름 함께 놀고 일했던 며칠이 10년이 훌쩍 넘은 2015년 가을날의 자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각자 결혼하고 취업하고 아이를 낳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무수히 많은 날을 겪어온 30대의 청년들이 20대의 기억과 기세로 모여 논다는 사실이 정말 신기하다. 살아온 무수히 많은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순간들을 세세하게 나누지 않아도 각자 뿜어내는 기운이 묘하게 어울리는 모양이 그야말로 삶의 예술이다. 삶의 예술은 모든 것을 담아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아간다.
막차 시간에 맞춰 헤어지고 지하철을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 산뜻했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은행나뭇잎은 솜털같은 어둠을 입었고, 곁을 스쳐가는 행인은 보푸라기에 달빛을 얹었다. 한껏 들뜬 모임에서 늦게 돌아온 나를 아내는 동그랗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아내는 나를 위해 대추생강차를 끓였고 나는 테이블 앞에 앉아 주절주절 모임 이야기를 했다. 씻고 나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고 아내는 덜 말랐다며 손으로 털어주었다. 동그랗게 웃는 아내의 얼굴이 밤안개 속 가로등 빛을 닮았다. 자리에 누워 동그랗게 아내를 안아보았다. 이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