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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Dec 10. 2015

아내 인감도장 파러가기

아내가 인감도장이 필요하다고 해서 회사 앞 도장가게에 갔다. 얼마 전 일 때문에 막도장 하나를 팠던 곳이다. 마포대로 길가에 공항버스 매표소 겸 껌, 초코바, 신문 등을 파는 노점과 녹차호떡을 파는 노점 사이에 있다. 가게 안에는 주인 할아버지가 작은 tv를 보고 있었다. 매상이 얼마나 될까, 가게 안이 춥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고개를 불쑥 들이밀며 인감도장을 하나 파달라 했다. 무언가를 만들며 간간이 tv를 보던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tv가 놓인 선반 밑에서 화려한 장식의 굵은 나무도장들을 꺼낸다.

"인감도장 2만 원부터! 5만 원 짜리도 있고. 2만 원은 중국산이고, 5만 원은 국산!"

"2만 원이요?? 너무 비싼데!"

나는 가게 앞 선반에 늘어선 플라스틱 도장들과 '막도장 2000원'이라고 쓰여있는 문구를 보았다.

"이거 그냥 아무 도장이나 해서 인감으로 쓰면 되지 않아요?"

"뭐 그래도 되지만... 이왕 좋은 거로 할 거면 그렇지"

아내의 첫 인감도장인데 너무 인색한가 싶어 그냥 2만 원짜리를 할까 고민하는데 탁! 할아버지가 종이를 내민다.

"이름 한자로 써봐!"

"한글로 하면  안 되나요?"

"아니 무슨 인감을 한글로 하는 게 어딨어. 한자로 해야 저 뭐야 위조가 잘 안되지"

그렇겠다 싶어 아내에게 카톡을 했다.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니 대학도 나온 사람이 한자 어떻게 쓰는지도 몰라?"

"네 ㅎㅎ 저희 세댄 그렇잖아요"

"김 그다음에 무슨 자라고?"

아직 답장이 안 왔지만 옥돌 민자이고 내 동생과 같은 옥돌 민인데 소리글자 쪽이 달랐던 게 기억났다.

"옥돌 민이요. 저거 아니 위에 네 그거 맞아요"

할아버지는 컴퓨터에 한자를 치더니 획을 드래그해서 늘리고는 다시 나를 보며 씩 웃는다.

"신기하지? 이렇게 하는 거야"

"네 그러게요 ㅎㅎ 멋지네요"


이제 도장을 골라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2만 원짜리 도장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뚜껑도 없다. 가게 앞 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노란색 도장을 골랐다. 허리가 잘록하고 뚜껑이 있고 가볍다. 할아버지에게 도장을 건네고 나니 왠지 모르게 현금을 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은행 좀 다녀오겠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속으로 막도장이 2천 원이니까 파는 공임 쳐서 한 5천 원 하겠네 싶어 만원을 뽑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돌아오니 가게 셔터가 닫혀있다. 놀라 가까이 가보니 옆문으로 할아버지가 나온다.

"아, 사장님. 도장은요?"

"아 도장~ 자 여기!"

꾸깃꾸깃 접힌 종이에 金玟芝印이 찍혀있다.

"잘 찍혔지?"

"그러네요 좋네요~ ㅎㅎ"

노란 도장을 받고 만원을 건네자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그대로 그냥 걸어간다.

"아 저기 사장님, 거스름돈은요?"

"응? 허허 거스름돈?"

"혹시 도장이 만원이에요?"

할아버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걸었다.


그 순간, 환하게 웃던 할아버지의 웃음을 의심했다. 

'2천 원 짜리를 만원에 판다고? 아무리 좋게 봐도 5천 원일 거 같은데 만원?'

'아니야 그래도 설마 이런 걸로 속이려고.'

'그런데 정말일까?'

1~2초도 안 되는 시간에 우왕좌왕하던 생각은 

'에이 할아버지한테 용돈 드린 셈 치지'

하는 데까지 나갔다. 길어야 2초 남짓한 시간 뒤에 나도 할아버지에게 환하게 웃으며 사무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도중 '도장, 명함, 복사'라고 쓰여 있는 입간판을 보았고, 하얀 조명에 말끔한 인테리어의 도장집에서 줄무니 셔츠를 입고 스마트폰을 하고 있는 사장님의 모습을 상상했다. 저 간판을 왜 못 봤을까.


이러나저러나 내 손에는 만 원짜리 노란 인감도장이 들려있었고 나는 도장 사진을 찍어 아내에게 보냈다. 아내에게는 할아버지가 바가지를 씌우려 했다는 말을 시작으로 처음부터 2만 원, 5만 원짜리 도장을 보여주었으며, 당신이나 내 스타일에 비싼 도장까진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작은 걸로 골랐는데, 마침 색도 노란색이어서 눈에 잘 띄고 뚜껑도 있어 편리하다고 했다. 5천 원 정도 할 줄 알았는데 인감에 맞는 서체가 따로 있고 프로그램 값이 반영돼서 만원 정도 한 것 같다고, 약간 억울한 감정을 담아 키보드를 눌렀다. 내가 본 사실과 그러리라고 믿는 짐작을 붙여 아내에게 이야기했고, 아내는 나의 억울함에 공감해주며 새 도장이 생긴 것을 기뻐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에 보고 들었던 단서들을 조합하여 처음 내 인식과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번잡하던 생각은 사라지고 감정은 가라앉았다. 그러고 나니 몇 가지 순간이 되돌아봐졌다.

1.  처음 노란 도장을 집었을 때 이건 얼마냐고 묻지 않았다.

막도장이 2천 원이라고 쓰여있긴 했지만 노란 도장이 얼마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2천 원'이라고 순간 정하고 넘어갔다. 할아버지도, 종이도 노란 도장이 2천 원이라고 말한 적 없다.
2. 도장이 만원이냐고 물었을 때 웃던 할아버지를 의심하는 동시에 의심하는 내게 죄책감을 느꼈다.

도장값을 최대 5천 원이라고 정해놓았기 때문에 의심이 생겼다. 의심이 생겼는데 너무 사람 좋게 웃으니 의심이 무색해졌다. 저런 웃음을 의심하는 나를 순간적으로 미워했다. 그러나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고 의심과 의심을 미워하는 것이 함께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니니 불안해졌다.
3. 아내에게 설명하며 상황을 재구성했다.

할아버지가 정말로 바가지를 씌웠을 수 있다. 사실은 모른다. 나는 인감도장에 맞는 서체와 인감도장용 컴퓨터 프로그램 값을 더했고, 낡은 가방을 메고 허름한 복장을 한 할아버지에게 적선(=할아버지가 동냥)했다는 허울 좋은 이유를 붙였다.

도장 하나 파는데 참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다. 다음에 도장 팔 일이 있으면 다시 그 집에 가겠다.  그때의 나는 또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하다. 누구 도장 팔 일 있으면 내게 이야기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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