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마지막 날, 휴가를 썼다.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간단히 집 청소를 한 뒤 북한산 둘레길로 나섰다. 우리 집은 북한산 밑에 있고 집을 나서면 바로 둘레길 코스가 이어진다. 3월 중 입주한 뒤 거의 처음 가 보는 둘레길이다. 아내는 집에 남아 약국에 출근하기 전 공부를 했다.
이게 얼마만인가 감개무량했다. 이 좋은 산을 두고 걷지 않던 내가 한심했다. 그렇지만 일단 걷고 또 둘러보는 길이 좋았다. 왼쪽 무릎이 약간 뻐근해오긴 했지만 마냥 좋은 기분이 났다. 집 앞 횡당보도를 건너 장미공원을 지나 7구간-옛성길 코스를 걸었다. 바닥엔 마른 가지가 깔려있기도 했고, 얼었던 땅이 풀리며 약간 질척거리기도 했다. 바위는 동그라니 순했고 나무는 높지 않아 편안했다. 언뜻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향로봉이니, 문수봉이니 비봉이니 하는 눈 덮인 봉우리를 보았다. 봉우리 사이로 해가 떠 있었고, 해 밑으로 아파트와 여러 건물이 서 있었다.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을 수 백 년 전 사람들도 걸었을 터였다. 그땐 아마 산 밑으로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 있었을 것이다.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푯말 대신 호랑이를 경계하는 표식이 걸려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돌 무더기로만 보이는 성벽 위에서는 창과 칼을 들이밀며 뛰어올라오는 적군을 맞아 부지런히 뛰어다니던 병사가 있었을 것이다. 천리 길을 봇짐 하나 메고 급제의 꿈을 안은 청년이 걸었을지도 모르고, 먹고살기 위해 부지런히 물건을 지고 나르던 가장이 걸었을지도 모를 이 길을 2015년의 마지막 날, 결혼한 지 반년, 입사한 지 3년 반, 태어난 지 32년 2개월이 된 남성 하나가 홀로 걷고 있다.
20대 후반에는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골몰했다. 30대 초반, 결혼 전에는 회사 대신 어떤 길을 가야 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결혼한 뒤에는 앞으로 나의 길이 얼마나 더 넓어질까 궁금해하고 있다. 결혼을 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익숙했던 것에 머무르던 나의 세계를 넓히고 싶은 바람이 있다. 실제로 나와 매우 다른 아내의 세계를 만나며 내가 알고 있던 나의 세계 역시 다른 모양을 갖춰가고 있다. 때론 굉장히 힘들고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잘 나아가고 있다. 남편-아내, 아들-딸, 시댁-친정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조금씩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서로 거울이 되어 자기 안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나는 아내와의 이 여정이 매우 설레고 기대가 된다. 남편으로, 아내로 우리는 어떤 모양을 만들어나갈까. 2015년은 그 여정을 나아갈 기초를 닦는 시간이었다.
올해는 기초를 더 단단히 닦는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열 준비를 하려 한다. 아빠-엄마라는 새 이름을 달고 싶다.(아직은 계획뿐) 이것 또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여러 가지가 펼쳐질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걸어갔지만, 어느 하나 쉽지 않았던, 특별하고 보편적인 사람살이의 또 다른 세계로 발을 디디려 한다.
그리고 남편, 아빠, 아들 등의 이름표를 떼고 남은 내게 어떤 이름을 붙일지 고민하는 한 해를 만들고 싶다. 무엇에서 기쁨을 얻고, 살아갈 돈을 벌고, 자존감을 얻고, 명예를 추구하고, 타인에게 인정받을지, 나의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방편은 무엇이고 어떤 준비를 해나갈지 준비하는 시간으로 삼으려 한다.
세상엔 정말 모르는 것 투성이다. 32년을 넘게 아들로 살아왔으면서 나는 여전히 아들 노릇이 뭔지 모른다. 거의 비슷한 시간 친구로 살아왔으면서 친구 노릇이 뭔지 모르고, 형 노릇이 뭔지 모른다. 남편 노릇, 아빠 노릇 역시 그럴 것이다. 모르면서, 아는 척해 왔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제대로 모르는 연습을 해 나갈 때다. 거기에서 출발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세워본다. 다만 아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