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는 아주 잘 자라고 있다. 갓난아기일 때는 약간 마르고 길었던 체형에 점점 살과 근육이 붙어간다. 특히 허벅지는 하루가 다르게 두껍고 튼튼해지고 있다. 안고 있으면 두 다리를 차서 튀어나가려 하거나, 상체를 잡아주면 다리 힘으로 잠깐이나마 스스로 서기도 한다. 이불이나 속싸개를 덮어주면 십중팔구 다리를 휘적거리며 쳐낸다. 다리를 쳐내는 와중에 두 팔은 따로 논다. 휘적거리는 데 어떤 리듬이 있어보이지는 않지만 보기만 해도 흥겹다. 사지를 각각 제멋대로 흔들어대는 통에 눈은 어지럽지만 마음은 즐겁다. 자기도 즐거운지 흥흥 콧김을 뿜으며 열심이다.
열심인 아들이 입고 있는 옷은 불과 60여일 전에는 커서 입을 수 없던 것이다. 저 옷을 언제 입나 하던 아들은 배냇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 때의 아들이 입고 있던 옷은 불과 60여일이 지나자 작아서 입을 수 없게 되었다. 서랍 속에 고이 개어져있는 여러 배냇저고리를 보며 마르고 길었던 서우의 몸을 떠올려본다.
나는 서우의 작은 팔을 이끌어 양 소매에 넣고 안쪽의 끈을 잡아 빼서 1차로 묶고, 겉의 끝을 묶어서 배냇저고리를 입혔다. 그리고 속싸개 위에 아이를 눕히고 왼쪽으로 한번, 오른쪽으로 한번 둘둘 말았다. 하얀 소라 껍데기에 쌓인 것 같은 아이는 머리만 빼꼼 내어놓고 응애응애 울거나 삐유삐유 새소리를 내거나 하아 퓨 한숨을 내쉬곤 했다.
기저귀를 갈아주려고 속싸개를 풀고 기저귀를 벗기면 아이는 버둥거리며 울거나 꼼지락거렸다. 엉덩이를 들어 새 기저귀를 밑에 깔고 헌 기저귀를 빼내는 재미가 있었다. 똥오줌이 묻은 기저귀는 돌돌 말아서 쓰레기통에 넣고 새 기저귀를 채워줬다. 밴드는 여유가 있었고 아이가 다리를 휘적거려도 기저귀 품이 남았다.
똥을 쌌을 땐 머리를 팔에 받치고 옷 상의를 걷어서 아이 머리와 내 팔 사이에 끼우고는 세면대로 갔다. 머리를 받친 팔의 손으로 아이의 두 다리를 X자 모양으로 교차하게 만들어서 잡고는, 다른 손으로 똥 묻은 엉덩이와 고추를 닦아주었다. 어리둥절한 가운데 불쾌하면서도 좋기도 하고 둘 다 아닌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는 두리번거렸다. 씻기는 도중에 오줌을 싸며 포물선을 그릴 때는 온 식구가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씻기는 도중에 똥을 더 싸면 아빠 일을 덜어주는구나 기특해서 웃었다.
젖을 갓 먹었거나 잠이 오지 않아 보채면 품에 폭 안고 걸었다. 왼쪽 팔로 엉덩이를 받치고 오른손과 손가락으로 뒷덜미와 관자놀이를 고정시키면 아이는 세상 구경을 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가누지 못하는 고개가 앞으로 꺾이며 쇄골에 부딪히면 아파서 으앙거렸다. 조금 토닥거리면 이내 울음을 그치고 다시 두리번거리다 서서히 고개를 가슴에 기댔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한동안 더 듣고 가만히 이불 위에 눕히려들면 끄응거리며 설핏 잠이 깼다가 완전히 깨서 울거나 다시 잠들곤 했다. 울면 다시 안을 수 있어서 좋았고, 잠들면 잠든 얼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이런 시간들 중 일부는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 되었다. 서우는 이제 배냇저고리를 입기에는 너무 커버렸고, 속싸개에 둘둘 말린 작은 소라껍데기는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기저귀 1단계는 커녕 2단계 기저귀도 허벅지가 두꺼워져 벗기면 등에 밴드 자국이 남는다. 한 팔로 아이를 지탱하고 세면대에서 똥을 씻기는 시절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일어나면 뻐근한 어깨와 팔로 알아간다. 고개를 가누지 못해서 이리 쿵 저리 쿵 할 때 머리를 잡아주는 시절은 가고 있다. 서운하고 아쉽다.
그러나 서운하고 아쉬운 것과 동시에 기쁘고 신나는 순간이 계속 온다. 서우는 이제 눈을 맞추고 웃을 줄 안다. 모빌을 보며 시선을 움직이고, 엄마가 젖을 주는 준비하는 걸 알아차리고 기다릴 줄 안다. 얼굴은 점점 이뻐지고 알 수 없는 소리도 종종 내기 시작한다. 앞으로 말을 하고, 기고, 뒤집고, 걸으면 또 다른 기쁨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서운하고 아쉽다. 그리고 이 서운하고 아쉬운 것이 아이가 주는 기쁨으로 대체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간다. 매일, 매 순간 새로운 아들과 만나고 이전의 아들과 이별한다. 만남과 이별이 늘 함께 하는 것이 육아구나 새삼 절실하게 다가온다.
며칠 전 서우를 안아주는 엄마, 아빠의 눈에서 갓난아기의 나를 보았다. 내가 자랄 때 엄마나 아빠도 그랬구나 새삼 알았다. 나는 그런 눈빛을 서우가 다섯 살이 되고 열 살이 되고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이 되어도 가지고 있을까? 그때도 나는 여전히 지나간 아들을 아쉬워하고 새로운 아들을 반가워할까? 서운함과 기쁨에 익숙해지지는 않을까? 갓난 아기 때의 서우를 그리워하며 지금 눈 앞의 서우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리석은 걱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서우의 배냇저고리, 속싸개 그리고 기저귀 1단계를 조금씩 잊어가고 있다. 그것이 아쉽고 두렵고 서운하다. 아름다운 그 순간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오늘도 집에 가면 여느 때처럼 잠든 아들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물끄러미 바라볼 것이다. 아이구 이쁜 것 한 마디 할 것이다. 새벽에 자다 깨서 기저귀를 갈고 재우려 노력할 것이다. 다시 오지 않을 행복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