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가 태어났을 때 열 손가락에 모두 손톱을 달고 나왔다. 신체에서 단단한 부위이고, 동물에 따라서는 무기가 되는 손톱이 자라 있었고 일부는 꽤 길었다. 손톱을 한 번 만져보기 위해 단풍잎 같은 손을 잡아보았다. 작고 가벼운 손가락을 잡으려 하니 사르르 바람에 나부끼는 깃털처럼 꼼지락거린다. 깃털 끝에 와 닿는 손톱은 아직 완전히 단단해지 않은 작은 조개껍데기 같다. 어릴 적 아파트 놀이터 모래 속에서 나오곤 했던 여러 모양과 색의 조개들.
친구들과 조개 싸움을 하기 위해 다 같이 머리를 땅에 고정하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대결에 쓸 조개를 고르곤 했다. 세로줄이 길고 촘촘하게 그어진 큰 조개는 아주 크면서도 쉽사리 부서졌고, 어떤 조개는 작지만 아주 단단해서 한번 깨려고 손바닥으로 내리치다 멍이 들기도 했다. 정말 가끔 나오는 소라 껍데기를 발견하면 그날은 놀이터의 승자가 됐다. 서우의 손톱은 아직 덜 여문 새끼 조개껍데기처럼 부드러웠다. 내 손가락 끝으로 서우의 손톱을 살짝 튕기는 기분이 좋다.
그러던 아이의 손톱이 요즘 들어 단단해지고 있다. 젖을 먹고 나서 트림을 시켜주려 품에 안고 집 안을 서성이는데 소화가 잘 안 되는지 용을 쓰며 팔을 휘적거린다. 그러다 옷깃을 잡고 손가락으로 꼭 쥐다가 가슴팍을 손톱으로 찍어 누른다. 아프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손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거나 참는다. 상처가 나지는 않았지만 아프다. 이 손톱으로 자기 얼굴이나 눈을 무심결에 할퀴면 어떠나 싶어서 얼마나 길게 자랐는지 다시 들여다본다. 약간 길어진 손톱을 자르기로 한다.
먼저 손톱을 잘라 본 아내가 아기용 손톱 가위로 손톱을 자를 때 종이를 자르는 기분이라고 한 말과 손톱 밑 살을 잘 눌러주지 않으면 살을 같이 잘라서 피가 나기도 하더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래서 잠들었을 때 자르곤 한다며. 서우는 살짝 선잠이 들었고 아내 팔에 안겨있었다. 나는 서우의 단풍잎 같은 손을 들어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가위 날에 잘려 나오는 손톱은 연필 깎을 때 나오는 나무 같기도 하고, 하얀 색종이 같기도 했다. 잘린 손톱을 아내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른 쪽을 자르려는데 움찔하며 움직인다. 다음에 다시 자르기로 하고 가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 손톱을 잠시 보았다.
깎아도 깎아도 계속 자라는 손톱. 어느 정도 이상 손톱이 길어지는 걸 싫어하는 내게 손톱 깎는 일은 나름대로 기분 좋은 일상이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터 손톱을 스스로 깎기 시작했을까? 7살? 8살? 기억나지 않는 그 시점 이전까지 내 손톱을 깎아준 건 엄마였을 것 같다. 장모님 말씀으로는 옛날엔 엄마가 이빨로 아기 손톱을 잘랐다고 한다. 나도 그랬을까, 아니면 또 다른 도구가 있었을까. 이러니 저러니 엄마가 깎아주던 손톱을 어느 순간 스스로 깎을 줄 알게 되었겠지. 심지어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간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서우도 그럴 것이다. 조금 슬프지만 괜찮다. 깎아도 깎아도 계속 자라는 아기의 손톱을 자를 때 나는 서우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어서 기쁘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쁘면서도 동시에 잘못 잘라서 아프게 할까 두렵다. 서우가 울 때 배가 고파서인지, 기저귀가 젖어서인지, 잠투정인지, 악몽을 꿨는지, 성장통인지, 공기가 안 좋은지 수많은 가능성을 뒤로하고 하나를 선택한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미리 알지 못하고 다만 해나간다. 이게 괜찮은 걸까, 저렇게 했어야 하나 망설이고 아쉽고 미안한 순간이 수없이 오고 간다. 그러면서도 아이 웃음 하나에, 휘적거리는 팔다리에, 있는 힘껏 내쉬는 하품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즐겁고 신나고 뿌듯한 순간도 수없이 오고 간다. 이렇게 기쁨과 두려움 모두를 안고 가는 것이 육아구나 알아간다. 그런 엄마와 아빠를 보고 듣고 느끼며 아이가 자라겠구나 한다.
그러니 한 번 깎아보고 다음에 다시 깎아볼 수 있는 손톱처럼, 매 순간 조심스럽고 정성을 다하되, 오늘 부족했어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엄마로서, 아빠로서, 아들로서 새롭게 돋아날 내일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다. 이렇게 세 가족이 함께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