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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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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Jun 14. 2017

왜 나는 아들을 사랑하는가

웃는 아이, 우는 아이

아들을 매우 사랑한다. 사실 사랑이라는 말도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어느 부분은 넘치고 어느 부분은 모자란 느낌이다. 그러나 내 세계에서 가장 겹치는 게 많은 단어이므로 사랑이라 하기로 한다.


물론 아내에게 느끼는 사랑과는 다르다. 아내에게 느끼는 사랑이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 또는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다면 아들에게 느끼는 사랑은 시냇물을 계속 따라가다 보니 강이 나오고, 강을 따라가다 보니 바다가 나오는 것과 같다. 바다에 가서 수면에 일렁이는 파도를 보다가 빛조차 희미한 심해로 들어가고, 거기에서 구우웅 소리 내는 고래를 볼 때 이런 느낌이지 싶다.


한편 예전에 함께 살던 난이라는 고양이를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고양이가 따뜻한 백사장 모래처럼 손을 넣으면 노곤하니 스르륵 부드러운 매력은 있지만 언제나 함께 할 수 없는 것에 비해, 아들은 폭신하게 젖은 숲의 흙처럼 말랑말랑하고 기분 좋은 냄새가 나서 계속 함께 눕고 뛰고 뒹굴고 싶다.


그런 아들이 내게 웃어줄 때면 깃털에 반응하는 고양이처럼, 공을 쫓는 강아지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아들 옆에 다이빙하며 눕는다. 그러면 아들은 다시 살짝 웃어준다. 나는 아들의 웃음에 목이 말라 누운 채 방정을 떤다. 아들의 웃음은 같은 방식을 반복해서는 얻을 수 없다. 나는 더욱 애가 타서 아들을 들었다 놨다, 내 몸을 들었다 놨다 한다. 퇴근 후 마주하는 아들의 웃음이 요즘 내 행복의 이름이다.

이틀 연속 야근하느라 자는 얼굴만 봤다 ㅠㅠ


돌아보면 서우는 신생아 때부터 배고프거나 잠들지 못하는 것 말고는 별로 우는 일이 없었다. 배고픈 것도 엄마가 규칙적으로 젖을 줘서 그런지 어지간해서는 찾지도 않는다. 조금 더 크며 소리를 지를 수 있게 되면서 우는 대신 짜증을 내거나 얼굴이 벌게지며 돌고래 소리를 냈다. 울음이 줄어드는 만큼 웃음이 늘었다.


그런 서우가 아침에 일어날 때 왼쪽 눈을 못 뜨기 시작했다. 밤새 흘린 눈물이 눈곱이 되어 달라붙는 바람에 갓 일어난 아들은 한쪽 눈만 뜨고 방긋방긋 웃는다. 마주 보는 내 얼굴은 방긋방긋, 속 마음은 엉엉 울상이다.


더 아기일 때는 양쪽 눈이 그랬다. 눈물샘이 막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다행히 안약을 처방받고 오른쪽 눈은 말끔해졌다. 그런데 왼쪽 눈은 나아지지 않아서 항생제 처방을 받아 열흘 가량 먹었다. 아들은 두 손으로 물약 통을 꼭 쥐고 약간 단 맛이 나는 항생제를 홀짝홀짝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차도가 없었고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대학병원에 갔다.


눈물샘으로 유명한 교수에게 갔는데 그동안 어떻게 마사지를 했는지 묻고 아내에게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아내가 생각보다 아파서 어버버 하는 중에 교수가 서우를 한번 쓱 보더니 방긋방긋 웃어주는 아이의 왼쪽 눈을 느닷없이, 인정사정없이 눌렀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충격과 아픔에 아들은 우왕 자지러지며 울었고 엄마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모두 멘붕이 왔다고 한다. 교수는 이런 마사지를 하루에 두 번 해주라고 한다. 제대로 하면 울 수밖에 없다는 말과 함께 1분 남짓한 진료시간이 다 갔다.


아내가 마사지하는 법이 적힌 자료와 동영상을 보여줬다. 눈 밑으로 뼈가 만져지는데, 그 뼈 능선 너머 안쪽으로 손가락을 들이민다. 그 뒤 코와 가까운 쪽에 있는 눈물샘을 손가락 스냅을 주어 단숨에 자극해야 한다. 그러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수압으로 코 안쪽에 길게 늘어진 눈물샘 끝단이 뚫리는 원리다.


이제까지 세 번 마사지를 했다. 서우는 손이 눈 근처로만 가도 고개를 휘적휘적 돌리거나 양손으로 저지한다. 아내와 함께 한 명이 주의를 끌고 다른 한 명이 그 사이 눈 마사지를 한다. 아이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고정하고 눈 밑 부드러운 피부를 손가락으로 꾹 누른다. 아이가 버둥거리기 시작할 때 안타까워 망설이는 마음과 나으려면 그래도 해야 한다는 독한 마음이 동시에 뜬다. 꾹 눌러서 튕기면 어김없이 서우는 운다. 아주 크고 강하게 운다.


아들이 우는 게 싫다. 울리는 건 더 싫고 아들이 나를 싫어하게 되는 건 더더욱 싫다. 마사지하던 중 아이가 움직여 눈을 찌른다거나 해서 시력이 손상되면 어쩌나 두렵다. 눈에 무엇인가 다가오는 것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기면 어쩌나 미안하고 눈물이 난다.


웃는 아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좋다. 우는 아들은 어렵고 불편하고 두렵다. 웃는 아들에게는 기분이 좋구나, 아이구 귀엽다라며 웃음 그 자체를 받아준다. 웃는 흐름을 타고 다른 웃음을 이끌어낸다. 그런데 우는 아들에게는 당장 아이고, 서우야 왜? 무슨 일이야? 뭐가 싫어? 가 나온다. 불이 난 것처럼 서둘러 울음을 끄려고 한다. 울음은 흐르지 못하고 갇혀서 잘린다.


서우는 울음으로 많은 것을 표현한다. 배가 고프거나 졸리거나 뭔가 불편해서 운다. 따라서 서우의 울음은 해결의 대상이 아니라 들어야 할 언어다.


그런데 웃는 게 좋으니까, 우는 건 싫으니까 아들을 둘로 나눈다. 웃는 아들과 우는 아들. 이렇게 나누기 시작한 아들은 나중에 더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될 것이다. 서우가 커가며 내가 좋아하는 아들은 줄고, 싫어하는 아들이 늘어나면 어떨까? 나는 그때도 아들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나는 아들을 사랑한다'보다 '나는 아들을 사랑해간다', 이게 더 좋다. 더 맞는 말이다. 나는 아직 나의 여러 모습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한다. 다만 사랑해갈 뿐이다. 연습하고 노력할 뿐이다. 더 나아질 수 있으므로, 짧은 순간 맛보는 사랑의 기쁨을 점점이 찍어갈 수 있으므로 나는 아들을 사랑해간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정말로 아들을 사랑한다고, 숨 쉬는 것처럼 아들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르니까 더더욱 사랑해가는 게 좋다. 다 알아버리면 무슨 재민겨 ㅎㅎ


서우는 앞으로 웃으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좋게 주고받는 법을 알아갈 것이다. 울며 슬픔과 괴로움이 주는 아픔을 거름으로 쓰는 법을 알아갈 것이다. 울 때 울음이 되고, 웃을 때 웃음이 되는 지금의 천진함이 오래도록 서우의 영혼과 함께 하길 기도한다. 자라며 상처가 있으면 치유도 있다는 지혜를 깨달아가길, 가능한 너무 아프지 않게 알아가길 기도한다.


그리고 완벽한 신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을 키우는 부모이길, 이 사실을 잊지 않길 간절히 기도한다. 집에 가서 마사지 해줘야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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