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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Jul 21. 2017

선의 질주, 면의 확장, 깊이의 역동

[영화리뷰] 설국열차 / 봉준호

설국열차 봤다.

여기저기 올라오는 리뷰마다 스포일러 주의 등의 문구가 있어서

설국열차를 보는 게 리뷰 볼 수 있는 예매 티켓을 구하는 것처럼 느꼈다.

영화를 보고 리뷰를 보니 역시 영화를 먼저 보길 잘했다.

덤으로 이런저런 리뷰, 인터뷰 등을 찾아보다가 페북 등에서 자주 보이던 글이 표절 문제로 시끄러운 것도 보았고

진위 여부를 떠나 리뷰 하나에 이렇게 피곤하다니 공식적인 글쟁이들의 삶이란...


영화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체제/계급을 이야기하거나 인류사/진화/미래 등을 이야기하는 걸 많이 봤는데

이렇게 다양한 해석을 담아낼 수 있는 틀이 된다는 점에서 잘 만든 대중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여러 가지 상상/발상을 하며 참 즐거웠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송강호가 거의 다 와 놓고서 뜬금없이 옆문으로 나가려는 부분.

그때까지 보아온 장면들이 촤라락 고스톱 패를 다시 섞듯 재배열되는 순간이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정해진 일을 하며 고정된 선로 위를 달리는 열차가

내게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으로 읽혔다.

한정된 일터에서 정해진 일을 하며 고정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부품으로 일하는 사람,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일하는 사람, 특정한 질서를 가르치는 사람,

가진 것과 주어진 것 없이 살아가는 사람, 질서를 지키는 사람.

그리고 세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앞칸으로 갈수록

생산하는 칸에서 소비하는 칸으로 변한다는 사실과

가장 앞 칸의 바로 직전 칸에 환각물질에 중독된 상태로 쾌락의 노예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꼬리 칸과 중간 칸에 있는 사람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혜택을 얻고 무위도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 극소수의 상류층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사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읽었다.


섬뜩하게 돌아봐진 것은 실제 삶의 양상이 직선의 욕망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욕망이 그렇고 가족의 욕망이 그렇고 사회의 욕망이 그렇다.

성공과 안정을 향한 직선의 욕망에 얹힌 일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 모두 열심히 앞으로 앞으로다.

지구는 둥그니까 앞으로 나가면 결국 다시 왔던 욕망의 자리로 돌아온다.

한층 더 강하고 헤어나기 어려운 불안과 중독성은 기본 추가 옵션이다.


그래서 열차를 선로에서 이탈하게 만든 눈사태의 전면적인 강습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선을 깨어버린 면의 광대함에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이 펼쳐지고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보는 북극곰의 시선으로 깊이가 더해져 세상에 가득 차는 고난과 희망이 보이는 듯하다.

무한히 반복되는 선의 순환에서 서서히 소모되어가던 생의 기운과 역동성이

면과 깊이를 만나 새롭게 뻗어가는 장면이 상쾌한 배경음악과 함께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언젠가 몇 년 전 어떤 일을 할까 고민하며 삶의 여정을 기차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기차에서 타기보다는 오히려 뛰어내려 거꾸로 걷고 싶노라 바랐더랬다.

풀도 보고 바람도 느끼고 나무에 손을 대어보며 내 걸음으로 걷고 싶노라 바랐더랬다.

그때는 들판은 영화 속의 설국처럼 거칠고 위험한 모습을 그린 건 아니었다.

다분히 감상적인 푸념이었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상적인 푸념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무엇이 정말로 삶에서 중요한 것이 아닌가,

10여 년 간 1년에 단 몇 초에 불과한 순간들을 담아 열차에서, 선로에서 뛰쳐나가고자

불! 퐈이어! 를 외친 송강호의 눈빛에,

그 눈빛에 공명한 가슴속 무엇인가에

정말로 삶에서 중요한 것이 깃들어있는 것은 아닌가 

자꾸 사무실 창 바깥을 보게 된다.


내가 가진 것과 배운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온 것을 찬찬히 돌아보니

그래도 털옷과 털신발 정도는 갖추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영화 다 보고 저 어린애들 앞날이 깜깜하구나 했는데 

기차에 있었을 때라고 해서 앞날이 환했나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니

애들도 저리 살아갈 텐데 나이 서른+@나 먹어서 무슨 걱정일까 근자감도 드는 것이다.


번역기, 찰진 한국말, 고아성(+ㅇ+), 회색 양복 아저씨, 도끼 떼거지와 생선, 틀니 총리, 스테이크, 피 닦아먹는 노란 재킷녀, 수동 엔진 아이 탑승(ㅠ), 식물원 등등
미처 언급하지 못한 많은 부분들까지 좋았다 정말.
회사 매점에 양갱이 다 떨어져 못 먹은 건 옥에 티 ㅠ 집에 가다 사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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