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미 Dec 10. 2017

고백은 힘이 세다

[Review] 인생 드라마 고백부부 

아내가 요새 화제가 되는 드라마가 있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고백부부라는 드라마인데 본 사람들이 다 힐링이 됐다며, 특히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사람들에게 엄청 와 닿는다고 했다. 서우 갓 출산하고 처가에서 같이 지낼 때 방에 불을 다 끄고 노트북으로 도깨비를 봤던 게 생각났다. 육아의 고단함 사이, 아들의 잠이 봄바람처럼 왔다 가는 사이에 한 편, 한 편 챙겨보는 재미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때 이후로 드라마를 본 적이 없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러자고 했다. 


결론적으로 고백부부는 내 인생 드라마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2부작이라는 비교적 짧은 회차가 하나씩 줄어갈수록 아쉬우면서도 그 다음을 보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에 괴로웠다. 한 회만 볼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출근하는 날은 그나마 2회로 줄었다. 


고백부부에 빠지게 된 건 1차적으로 주인공 부부가 아들이 있는 30대 커플이라는 상황 덕분이다. 아들 이름을 부르며 울다 깨는 장나라를 보며 나도 울었고, 회상 속 환하게 웃으며 뛰어노는 아이를 보면 그저 흐뭇했다. 보다가 아내와 이야기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느 시점으로 가고 싶냐고. 어느 시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군대는 다시 갈 만한 것 같고, 스리랑카는 안 갈 거다. 삼성전자 주식을 살 거고,(비트코인도 사고) 판교에 땅을 사라고 할 테다. 그러나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기회가 주어져 과거 어느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아들을 만날 수 없다면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 지금의 기억을 갖고 과거의 일상을 제대로 살 자신이 없다. 밤마다 울다 깨는 마진주가 정상이고, 헤헤거리며 학교 다니는 최반도가 비정상으로 보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부모 심정이라는 단어로 축약되는 엄청나게 강렬한 인연의 끈에 나는 기꺼이 묶여있다. 


그런데 회차가 거듭될수록 이 드라마에서 부모와 자식의 고리 말고 부부의 인연이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이 부부, 너무 불행하다고 이혼하자고 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서로 애틋하고 잘 챙긴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최반도가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사다주고 벅벅 긁는 장면,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친정에 아주 좋아하는 복숭아 빼고 보내달라고 하는 장면은 뭉클했다. 관심과 배려가 반짝였다. 


반면, 남편보다 영업사원으로, 아내보다 엄마로 사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자 두 부부는 삶에 지쳐 스스로를 끌고 가는 데 급급하여 서로를 들여다 볼 여유가 없어진다. 연애부터 신혼까지 관심과 배려로 빛났던 두 사람의 삶은 진심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거짓과 진실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표류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누군가의 잘못이어야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을 만나고 또 만들어간다. 


진심은 통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쉽지 않다. 진심은 방향이 있다. 최반도는 아내를 웃게 해주고 싶은 진심이 있었다. 마진주는 같이 울어주었으면 하는 진심이 있었다. 두 사람의 진심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둘 다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다만 서로 방향이 달랐고, 달랐다는 사실을 몰랐다. 알기 전에는 왜 저러나 싶을 뿐이다. 이해가 안되고 야속하고 밉다. 억울하고 답답하다. 서로의 방향을 알고 맞추기 전에 진심을 흐르지 않는다. 진심이 깊으면 깊을수록, 강하면 강할수록 흐르지 못한 마음은 거세게 역류한다. 


상대의 마음 쓰는 법을 아는 것, 같은 상황에서 다른 모양으로 마음을 내는 것을 아는 것이 물꼬를 트게 해준다. 알기 위해, 듣기 위해 Go Back이 필요하다. 한창 마음을 내는 데 열중하고 있는 지금보다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서 밖으로 꺼내기 전의 마음이 어땠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처음 거기 있던 마음을, 이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나는 너를 위로하고 싶어서 웃게 해주고 싶었다. 나는 위로받고 싶어서 같이 울어주었으면 했다. 그렇게 告白하는 것-마음을 밝혀 알리는 것은 힘이 세다. 깜깜했던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면 거세게 역류한 마음이 조금씩 순탄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정남길의 고백도 상처로 얼어붙은 마음이 풀어지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내게는 첫사랑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라는 말로 차이고 나서 돌아가는 정남길의 뒷모습이 그렇게 쓸쓸하고 아플 수가 없었다. 고백의 긴장과 너무 깔끔해서 어떻게 더 해 볼 여지가 없는 거절의 충격으로 한없이 좁아진 감각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땅의 진동을, 마음의 흔들림을 온몸으로 전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고백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둘러싸고 있던 의도적인 차가움을 깨뜨릴 수 있었다. 고백은 그 자체로 엄청난 용기인 동시에 결과에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갈 큰 힘이 된다. 단 고백의 결과는 그 순간에 두고 온다는 전제 하에.


사실 나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예전에 총각 시절 부모님과 살 때는 드라마 하는 시간이 집에 와서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빈둥거리는 시간과 정확히 겹쳐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노라면 엄마가 과일 먹으러 나오라 하셨고, 나는 거실에 나가 사과 두서너 개 우적거리는 동안 화면을 보았다. 그 장면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물으면 두 분은 눈은 화면에 고정하고 입으로만 짧게 말씀해주셨다. 그렇게 있다가 먹을 만큼 먹었다 싶어 방에 들어가려면 엄마는 꼭 나를 한 번 더 붙잡곤 했다. 사과 좀 더 먹어 아들. 나는 다 먹었어요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나를 쫓는 두 분의 시선을 느끼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역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우선이었다.


조금 더 어릴 때는 거실에서 드라마를 곧잘 봤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MBC에서 했던 '그대 그리고 나'다. 최불암과 김혜자, 박상원, 차인표, 송승헌 3형제의 이야기가 왠지 모르게 가슴을 쳤다. 특히 우수에 젖은 막둥이 송승헌을 보며 나는 내 동생의 송아지 같은 눈을 떠올리곤 했다.(지금도 그렇다. 가슴도 둘 다 두껍다.) 그리고 KBS에서 했던 '파랑새는 있다'에 나온 이상인과 박남현(절봉이) 두 사람이 마당에서 차력 연습을 하는 모습이 아련하게 남아 있다. 과장되지 않은 삶의 모습에서 인생의 별 것 없음과 고단함을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떠올리면 가슴이 젖어오는 단편 드라마, MBC 베스트극장에서 했던 '내 약혼녀 이야기'가 있다. 잠깐이지만 나는 극중 허영란에 반했고, 당시 제일 잘 나가던 개그맨 김국진이 아닌 배우 김국진의 팬이 되었다. 그가 현실에서 이혼하고 골프 선수의 길을 걷는다는 소식을 들으며 나는 베스트극장에 나왔던 겉은 차갑지만 속은 여린 남주인공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중에 라디오스타에 나올 때까지 그를 잊고 살았다.


가슴에 남은 드라마는 내 일상과 분리가 잘 되지 않는다. 자꾸 드라마에 머물고 싶다. 드라마 속 인물의 모습에서 나를 보고, 내 모습에서 드라마 속 인물의 모습을 본다. 그 인물과 이미 친해져있던 나는 현실 세계의 배우에게도 인물을 투영해서 본다. 새 배역으로 다른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를 볼 때면 낯설고 때로는 서운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드라마 속의 무엇인가와 내 안의 무엇인가 만난 것이다. 


그렇지만 내 안의 무엇이 드라마에서 만난 것과 100% 일치하는 것은 없다. 드라마에서 만난 것에 머물면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만나고 헤어져야 한다. 앞으로 나아갈 힘을 내는 것, 내 안의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고백하고 사랑하는 것, 내 옆에 있는 가족에게 나의 마음을 고백하고 사랑하는 것. 고백부부를 만나고 얻은 것들이다. 


그래서 고백부부를 만들어준 장나라 씨나 손호준 씨를 비롯한 배우들, 스탭들에게 참 고맙다. 마진주로, 최반도로 살아줘서 고맙다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부부의 모습과 기쁘고 슬픈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어 고맙다고, 어느 새 내게 아내가 아닌 서우 엄마로 살아가고 있는 아내의 본래 이름을 일깨워주어 고맙다고 이 작은 공간에서나마 꼭 전하고 싶다. 드라마의 좋은 기운으로 일상을 풍성하게 가꾸어가겠다.



(+) 내게는 개인적으로 장나라 씨와 손호준 씨의 재발견이었다. 그렇게 히트작품이 많다는데 난 장나라 씨가 출연한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정말 좋은 배우구나. 이제부터 팬 해야지. 나보다 누나다 ^^ 손호준 씨는 삼시세끼 이미지가 더 좋은 쪽으로 확장되었다. 나도 장모님 보고 싶다고 포도 상자 들고 울 때 같이 울었다. ㅠㅠ 

(+) 김미경 씨(마진주 엄마)의 연기에 그저 눈물만 났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에요.' 정말 아무리 슬퍼도 단단해질까, 무뎌질까, 자식 키우다 보면 다 괜찮아질까 나도 묻고 싶었다. 부드럽고 단단한 눈빛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 이병준 씨(마진주 아빠)가 혼자 일어나서 밥을 먹는 장면에서 그렇게 눈물이 났다. 아빠가 종종 술을 드시고 온 날 취해서 노래방에 가자고 식구들에게 졸랐던 게 생각났다.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행동인데, 우리 식구는 모두 다음에 가자며 미루고 아직까지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기회가 될 때 얼른 노래방에 가야겠다.

(+) 이이경 씨는 잘생긴 얼굴로 못생김을 연기했다.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 원작 웹툰은 초기 몇 화를 보다가 말았었는데 완전 다른 작품이다. 야해서 좋긴 했었다.

(+) 서진이 웃는 모습이 서우와 겹쳐져 흐뭇했다. 아내도 그랬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의 질주, 면의 확장, 깊이의 역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