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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Mar 04. 2018

원래 그런 세상?

그런 세상도 있지, 하지만 나는!

1. 

예정에 없던 야근이

예정보다 늦어졌다. 

이틀째인가, 사흘째인가. 

깨어있는 아들을 본 지 수십 시간이 지났다.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다. 

다음 주 월요일 부회장에게 주간 단위 보고를 위해

자료를 만드는 일이다. 

새로 온 전무는 이제껏 보지 못한

owner-driven? 타입이다. 

오너가 원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파악하고 명쾌하게 전달하는 데 뛰어나다. 

정확한 파악과 명쾌한 전달을 위해

나를 비롯한 팀의 선배들은

전무의 코치, 지적, 갈굼을 받아낸다. 

그렇게 전무는 다음 보고를 위해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의 최선이 옳다고 보지는 않지만

오너에게는 옳다. 

그것이 그의 경륜이고 역량일 것이다. 

내게는 욕이 나오는 상황이다. 


2. 

퇴근하는데 퇴사한 형 연락이 와서

부장님 한 분과 다른 형까지 넷이서 만났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갔을 텐데

퇴사한 형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들을 겸 남았다. 

덤으로 정말 새로운 세상인 부동산과 주식 이야기도 들었다. 

나랑 먼 이야기라는 실감과 알아야 하지 않나 싶은 조바심을 털고 일어서니 11시 50분. 

추적추적 진눈깨비가 부장님 차에 오르자 폭설로 바뀌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고속터미널에 내려주셨고 

수서역까지 3호선 타고 내렸다. 

12시 34분인데 다행히 집까지 걸어갈 만한 거리에 내려주는 버스가 있었다. 

눈은 더 거세게 내렸고 번개가 쳤다. 

정류장에서 내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내 평생 24년 동안 눈 올 때 번개 친 거 처음 봤다고

핸드폰 너머의 누군가에게 신이 나서 얘기했다.

내 인생에서는 눈 번개가 두 번째인가 하며

요즘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3. 

집에 들어오니 아내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옅은 전등이 켜져 있어 집에 들어서도 깜깜하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아침에 먹을 홍삼과 영양제가 놓여 있다.

어느 정도 정리되고 어느 정도 어지럽혀진 거실에서 

분주하고 정신없던 아내의 하루, 

하루의 끄트머리를 본다.

   

씻고 나와 거실에 잠시 누웠다. 

내가 바라는 건 

퇴근하고 깨어있는 아들 얼굴을 보고 목욕시켜주고 조금 놀다 재우고 

아내와 수다를 떨다 책을 읽다 자는 것 정도인데

이 작은 행복을 누리기가 왜 이리 어렵나. 

새로 와서 오너에게 잘 보여야 하는 전무 때문인가,

다른 조건의 회사로 이직하지 못하는 부족한 내 역량 때문인가. 

아니면

아들과 아내와 함께 저녁을 보내는 게,

혹은 여유로운 아침을 보내는 게

작은 행복이 아니라 쉽게 얻을 수 없는 큰 욕심인 걸까. 


사실 따지고 보면 

내게 주는 좋은 영향을 생각하면

작은 행복이 아니라 큰 행복이다. 

나는 큰 행복을 작은 것이라 포장해서

지금 상황을 불평하는데 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새로 온 전무가 했던 무수한 말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하도 여러 번 얘기해서...)

“사람들은 항상 세 가지를 말한다. 

남 탓, 상황 탓, 자기 합리화. 

세 가지를 아무리 해봐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내가 바뀌고, 행동으로 옮겨야 바뀐다. 

가족을 챙기고 건강을 챙기고 자기 계발하는 등 인생에서 실제로 중요한 일은 

결코 시간이 나지 않으니 시간을 내서 해야 한다. 

내가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운동을 하는 것도 그래서다."

어찌 보면 정확한 현실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이직 준비를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다.

시간은 주어지지 않고, 원래 쉬거나 자거나 빈둥거리던 시간을 빼서 써야 한다.

엄마나 아빠한테 전화 자주 안 하다가

가끔 하고 나서는 자주 해야지 하고 한참 있다가 연락한다.

중요한 일이라고 깃발을 세운 것은 보이지 않는데

중요하지 않지만 자극적인 것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4.

전무의 세상에서 야근은 일상이다. 

시간을 이렇게 쓰는 게 당연하다.

야근을 같이 하는 선배들도 묵묵히 일한다.

그런 걸 보며 원래 이런 건가 되뇌는 나를 본다. 

전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원래 그래!"


그는 글로벌 탑 티어의 컨설팅 펌을 나와서

국내 탑 3 대기업의 부장으로,

국내 굴지 건설사의 30대 임원으로 

10여 년이 넘게 상무와 전무 생활을 해왔다.

그는 남들보다 두 배 일했고

개인의 자산을 늘리는 데도 부지런하여 수십억 대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모두 직접 본인이 말해준 이야기다.)


그런 그의 경험상 세상은 원래 그렇다.

회사 일에는 마감이 있고, 마감이 지난 일은 아무리 잘해도 인정받지 못한다.

야근은 마감을 맞추고,

마감 전 원하는 수준의 퀄리티를 만들고,

오너에게 전할 적절한 톤과 매너를 조율하는 데 쓰인다.


그래서 모두가 10시, 11시까지 작업해서 만든 자료는

다음 날 두세 시간 남짓 보고용으로 쓰이고

우리는 다시 다음 주 보고를 위해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전 팀장/임원과 다르게 오너의 신임을 부쩍 얻고 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이 사람은 꽤 오래갈 것 같다.

말을 잘하고, 머리도 좋고, 추진력이 있다.

그가 말하는 원래 그런 세상에서는  잘 나갈만한 뛰어난 사람이다.


5.

원래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걸 요즘처럼 실감한 적은 없었다.

전무 덕분이다.

그가 입사하며 가져온 당연한 야근과 끊임없이 직원들을 움직이게 하는 조직 문화는

함께 일하던 선배들,

너무나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원래 그랬던 것처럼 행동하는 선배들을 다시 보게 해줬다.

나는 실상 이런 세상에 살고 있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눈이 어두웠는지, 알면서 모른 척했는지

생소하기만 하다.


아내의 불만에 나도 힘들다고 항변하다 문득 돌아보니

이거야말로 원래 그런 세상에서 쳇바퀴 돌리며 살겠다는 말이구나 

목덜미가 선득했다.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이런 세상이 아니다.

그건 확실하다.

그런데 나는 계속 이 세상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헉.


6.

원래 그런 세상 말고 다른 세상에서 살아야겠다.

아내와 며칠간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다 서로 공감한 건 삶의 전제를 바꿔야 한다는 것.

장모님께서 요 며칠 진심으로 해주신 말씀은 회사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혼이 담긴 내 인생을 살 것.


그 세상은 내 안에 있고 나의 자부심에서 시작될 것이다.

나는 그 자부심을 찾기 위해 글을 쓰려고 한다.

도망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파고들어가는 글을 쓰겠다.

내가 한 행동과 말을 꾸미거나 감추지 않고 쓰겠다.

쓰기 위해 쓰지 않고

살기 위해 쓰겠다.


원래 그런 죽은 세상 말고

늘 새롭고 변화하는 살아 있는 세상에서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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