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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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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Oct 10. 2017

아들이 자라고 사랑도 커진다

 두려움도 강요도 그렇다

서우가 안방에서 엄마 젖을 먹다 잠이 들었다. 엄마도 잠이 들었다. 오랫동안 뜸했던 서우일기를 적어본다.

(중간까지 쓰다 육아에 밀려 하루 뒤에 마저 쓴다.)


1.

돌이 한 달 남짓 남은 서우는 이제 제법 아빠 소리를 낸다. 발성하다 우연의 일치로 아빠 하는 게 아니라 눈을 마주치고 나를 부른다. 서우에게 나는 '아빠'라는 이름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외삼촌을 부를 때도 아빠 하는 걸 보면 성인 남성을 지칭하는구나 싶기도 하다. 아무려나 서우가 나를 부를 때면 기쁘고 반갑다. 나를 찾는 게, 나를 부르는 게 좋다. 같이 놀다가 잠깐 손수건을 가지러 가거나 기저귀를 가지러 가느라 시야에서 사라지면 으아아아 하며 부른다. 나는 여기 간다 여기 갑니다 하며 종종걸음을 친다. 서우는 눈 앞에 나타난 내 다리를 붙잡고 잉잉거린다.


2.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으면 소리를 지르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다.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흔들흔들거린다. 그러다 고개를 오른쪽 아래로 젖히며 빼꼼- 쳐다본다. 가만히 지켜보려 해도 이어지는 애교에 참을 수 없어 웃음이 난다. 장난감이나 가구를 잡고 서 있을 때 옆에서 흔들흔들~ 흔들흔들~ 소리를 옆에서 내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리듬을 탄다. 아내는 자기 흥을 닮은 거라며 옆에서 들썩들썩 몸을 흔든다. 아내의 몸짓을 보며 그렇겠다 한다.


3.

연휴 중 아내가 손톱 가위로 서우의 앞머리와 옆머리를 약간 다듬었다. 더 아기였을 때 까까머리에 동글동글한 사진을 보며 이땐 진짜 귀여웠다 아쉬워하던 게 무색할 만큼 귀엽다. 아들 덕질에 끝이 있는 걸까. 끝이 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문득 두렵다.

아내의 첫 이발로 아들 덕질의 새 장이 열렸다


4.

물론 지금처럼 보기만 해도 물고 빨고 싶은 시절의 끝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걱정이 되는 것은 아들과 거리를 알아채지 못하고 일방적인 관계가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 거실에 벽걸이 CD 플레이어가 있다. 예전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것인데 요즘에는 꼭 한 번씩 거쳐가는 놀이 코스가 됐다. CD가 돌아가는 모양이 재미있는지 재생이 시작되면 소리를 지르며 저기로 가자며 다리에 매달린다. 안고 일어서서 돌아가는 CD 앞으로 가면 손가락을 데어 본다. 스르륵 멈추는 모양과 손끝에 닿는 느낌이 재미있는지 히히 웃는다. 

그렇게 몇 번을 하다 이제 그만하자 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서우는 싫다고 소리를 내는데 후다닥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며 머리 속에 순간적으로 이유를 생각해냈다. 

CD를 인위적으로 멈추다 플레이어가 망가질 수 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양을 계속 보면 뭔가 좋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좀 어이가 없는데 이때는 CD를 멈추며 노는 일을 계속하는 게 맞지 않다고 여겼다. CD를 돌아가게 한 것도 나고, 그 앞으로 데려간 것도 나고, 앞에서 멀어지게 한 것도 나다. 여기 재미있는 게 있으니 가보자고 하고 내가 싫증이 나자 딴 데 가자고 한 셈이다. 서우는 내 눈을 멀뚱히 보다가 다시 가자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다 바닥에 내려놓자 다시 한번 나를 빤히 보더니 후움 코로 숨을 내쉬고 다른 장난감으로 간다.


5.

빤히 보던 눈빛이 나를 움찔하게 하는 게 있었다. 앗 이거 뭐지 하며 있는데 번뜩 스쳐가는 표정이 있었다. 서늘한 서우의 얼굴. 조용한 분노가 서린 듯, 아무런 감정도 기대도 없이 가만히 정색하고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얼굴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던 싸늘한 10개월 아기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내는 서로 다투고 난 뒤 대화하며 풀 때 내가 정색한 얼굴이 무섭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 정색한, 싸늘한 얼굴을 마주하기 어려워 본인이 먼저 벌컥 화를 낸다고 한다. 최고의 수비는 공격이라며. (정작 나는 벌컥 화를 내는 아내가 무섭지만... ㅋㅋ) 내 얼굴이 저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내가 싸늘한 표정이 나올 때는 주로 강요받는다고 느낄 때다.


6.

강요를 싫어하는 나는 아마 엄마나 아빠의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강요 속에서 컸을 것이다. 그에 대한 나름의 생존 방식으로 정색하는 표정을 장착했을지도 모르겠다. 입을 꾹 다물고 빤히 눈을 바라보는 어린 아들에게 엄마나 아빠가 말을 더 붙이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아니면 당신들께서 당신들의 부모와 해온 소통 방식을 내가 보고 배운 것일 수도 있겠다. 역설적이게도 강요를 싫어하는 만큼 나는 강요의 전문가다. 누구보다 민감하게 강요를 감지한다. 그리고 강요한다. 아내에게, 부모님에게, 회사 동료에게, 아들에게.


7.

강요를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다면 사랑이 커지는 만큼 강요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지 정확히 보지 않는다면, 아이를 사랑하면 할수록 아이는 나의 치부, 무의식에 감추어둔 비밀, 싫어하지만 가장 잘하는 것이 담긴 표정과 말과 행동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탓할 것이다. 넌 왜 내가 사랑을 주는데 증오를 주니.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순간에는 사랑도 증오도 없다. 그저 서우 빠돌이만이 있을 뿐 ㅋㅋ


8.

한 존재에 대한 애정이 커질수록 그에 대한 반대급부도 함께 커진다는 사실을 알아간다. 정을 쏟은 만큼 배신의 상처가 크고, 행복한 만큼 불행이 찾아온 자리는 황폐하다. 아이의 웃음을 사랑하는 만큼 웃음이 사라진 자리가 아플 것이고, 아이의 울음이 아픈 만큼 울음이 사라진 자리가 환할 것이다. 그런 줄 알고, 또 그럴 줄 알고 아들을 만나가려고 한다. 자꾸자꾸 까먹지만 그래도 계속 계속 되새기려 한다. 어쨌든 나는 아이의 웃음이 너무 좋으니까, 저 웃음을 계속 지켜주고 싶으니까.

이런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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