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리틀 포레스트
출근 후 바로 시작한 회의가 쉬는 시간 없이 12시까지 이어졌다.
11시쯤 지나자 꼬르륵 위장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내 졸리던 눈이 번쩍 뜨이고 정신이 맑아지면서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짧은 순간이 클로즈업&슬로 모션으로 보인다.
높아진 집중력은 먹는 상상으로 이어졌다.
김이 나는 하얀 밥을 숟가락 가득 꾹꾹 눌러 담아
자루까지 까득 물고는 허버버버 뜨거워 김을 뿜어내고,
하얀 생태 속살을 뭉텅 발라내어 입에 털어 넣고
쑥갓이 풀어놓은 시원함을 고춧가루가 점점이 찔러주는 국물을 후루룩 마신다.
겉은 바삭한 듯 부들거리지만 속은 따뜻하고 보들거리는 하얀 두부 부침을
진리의 단짠 간장에 찍어 크게 베어 문다.
마침내 회의가 끝나고 부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겁고 괴로운 상상이 마침내 현실이 되려는 순간에
"12시네 벌써. 같이 식사나 하지."
한 마디에 누구는 식당을 예약하고 누구는 먼저 가서 자리를 지킨다.
회사 잠바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털레털레 한껏 게으르고 타성에 젖은 몸짓으로 식당에 향하는 느긋함은 없다.
먹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닌,
혹은 그 모든 것인 사회생활의 한 장면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대부분 부회장이 시키는 것을 시키고
몇몇은 소신껏 시킨다.
나는 소신껏 시키는 쪽이다.
파스타 집에 왔고 새우 로제 파스타를 먹었다.
천천히 먹는 데다 오른쪽 아래 어금니를 치료 중이어서 왼쪽으로만 먹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속도가 느렸고 내가 먹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식사를 끝냈다.
다행히 나보다 더 느리고 더 꿋꿋하게 먹는 차장님 한 분이 계셔서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먹었다.
그러다 그 차장님마저 다 먹고 나니 수저를 든 사람은 나밖에 남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대고 꼿꼿이 앉았다.
부회장이 한 마디를 하면 그 말이 향한 곳에서 웃음과 짧은 말이 나왔다.
쉽게 이어지지 않는 말과 말 사이에 나는 내 앞에 놓인 파스타를 보았다.
여느 때의 나 같았으면 결코 남아있지 않았을 면발이 둥그렇게 말려있었다.
다행히 새우는 다 먹었어. 세 개였지 아마?
혹시 남은 새우가 있나 숟가락으로 뒤적여보았다.
누군가 말하며 시선이 집중될 때 오른손이 움찔거렸다.
지금 바로 한 입 크게 먹으면 다 먹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침묵 속에서 면을 우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상상을 하니
차마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의 움찔거림을 겪고 나니 내 앞에 놓인 접시를 집어던지고 싶어 졌다.
싸 달라고 할까 잠깐 떠오른 생각은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꼿꼿이 등을 대고 앉아있는 시간이 15분 정도 더 이어지는 동안
굳어져가는 파스타가 아깝다는 생각은 끊임없이 샘솟았다.
브리야 사바랭이라는 18세기 미식가가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파스타를 남기고 먹을까 말까 멈칫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의 먹고 사는 현 위치는 어디에 있나?
배고파서 고향으로 내려온 혜원이
언 밭에서 배추를 뽑고 된장을 풀어 뜨끈하게 끓여서
냄비로 지은 밥과 뚝딱 한 끼를 먹고 하아~ 한다.
그 한 장면에서 먹는 것과 사는 것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먹는 것은, 먹을 것을 요리하고 작물을 기르는 것은
아기 양파가 스스로의 힘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 추위를 견디게 도운 것처럼
혜원의 엄마가 차근차근 심고 가꾸어 준 삶의 뿌리다.
혜원의 엄마는 먹고 살 줄 알았고,
혜원도 엄마에게 먹고 사는 법을 배웠다.
그녀가 만들어 먹는 모든 먹거리에는 뿌리가 있다.
친구들과 밤을 지새우며 놀고 잠결에 농사의 꿈을 웅얼거리게 하는 막걸리,
토라진 친구의 마음을 돌리는 수정처럼 빛나는 크렘 브륄레,
뜨거운 여름날 죽죽 흐르는 땀과 함께 후루룩 마시는 콩국수 등
사람과 자연과 사람의 꿈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단 맛이 나는데 달지 않은 것과
짠데 짜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재하의 섬세함이
혜원을 위해 보아둔 사과 한 알에 담겨 있고,
죽을 각오로 아빠의 술을 가져와
친구들과 달빛을 안주 삼아 즐기는 은숙의 유쾌함이
싸운 듯 우는 듯 눈물을 쏙 빼는 빨간 떡볶이에 묻어난다.
사람은 서로 만나고 이야기한다.
만나고 이야기하며 먹고 마신다.
먹고 마시며 살아간다.
그리고 다시 서로 만나고 이야기한다.
먹고 사는 것은 서로 다른 게 아니어서
먹기 위해 살거나 살기 위해 먹는 구분은 무의미하다.
정말로 정말로 먹는 모습이 곧 사는 모습이다.
혜원이 아카시아 꽃 튀김을 바사삭 먹을 때
내가 사는 세상, 내가 먹는 세상의 껍데기가 와사삭 부서지는 듯했다.
아얏.
대안적인 삶에 대해 그림을 그려보는 요즘
농촌이라는 공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기보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농촌을 떠올릴 때 영화 속 농촌은 리얼 판타지였다)
먹고 사는 문제의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려주었다.
때마침 부회장과의 점심이 연결되었으니 그에게 감사할 일이다.
단단한 감이 말랑말랑한 곶감이 될 때까지
엄마가 돌아와 딸이 새로 만든 감자빵 레시피를 볼 때까지
돌아오기 위해 떠난 길에서 내 삶의 뿌리를 내리고 튼튼해질 때까지
겨우내 시간을 보내고 틔운 싹 하나가 작은 숲이 될 때까지
심고, 캐고, 까고, 자르고, 데치고, 치대고, 젓고, 뿌리고, 끓이고, 찌고, 삶고
사이사이 기다리고 지켜보고
잘 먹고 잘 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