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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May 10. 2018

나의 백팩 연대기

가방에 담긴 하루

가방을 샀다.

내 인생에서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지만

군 제대 후 세 번째로 산 가방이자 백팩이다.

 

나는 이제껏 백팩만 샀는데 두 손이 자유로운 게 좋아서 그렇다.

비 오는 날이 싫은 이유 중 하나가 한 손에 우산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손이 자유롭다고 딱히 뭔갈 하는 건 아닌데

두 손과 팔, 어깨를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는 게 좋다.

 

브리프 케이스도 한 손의 자유를 뺏는다.

다른 사람이 들고 다니는 걸 보면 멋있다 싶기도 하지만 역시 양 손이 자유로운 게 더 좋다.

비 오는 날 브리프 케이스와 우산을 들고 다니는 하루는 최악이다.


한쪽 어깨에 메는 방식은 어깨에 제약을 준다. 

이미 오른쪽 어깨가 삐뚤어져 있는데 더 뒤틀리게 하고 싶지 않다.

양 어깨에 동일한 부하가 걸리는 게 좋다.


가끔 어깨와 허리도 자유를 달라고 아우성이긴 하다.

그러나 가방 없이, 

가방에 들어가는 책, 노트, 필기구, OTP, 도장, (가끔) 우산 없이

맨 몸으로 다니는 홀가분함이

내게는 불안으로 다가온다.


첫 번째 가방은 20대 중후반 스리랑카에 갈 때 샀던 HP 노트북에 부록으로 딸려왔다.

네모 직각 투박한 가방으로 백팩이면서 브리프 케이스처럼 가로로도 들 수 있었다. 

(브리프라고 하기엔 너무 뚱뚱했지만)

어깨끈이 금속 고리에 달려 있어서 탈착 가능했던 이 가방을

스리랑카에서 귀국 후까지 수 년간 이것저것 많이도 넣고 다녔다.

노트북부터 옷가지에 책과 칫솔 등

가방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세팅으로 다녔다.

수납공간이 매우 적고, 어깨끈이 너무 두꺼워서 메기에 불편했지만

긁히지 않고, 튼튼하고, 디자인이 심플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몇 년을 메고 다니다 어깨끈을 고정하는 고리가 끊어졌다.

마침 30대에 들어서자 어깨에 눌리는 무게가 심상치 않아서 

종종 동생의 장스포츠 캔버스 가방을 메다가

면접 등 양복을 입어야 할 일이 생기면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일할 때 받은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다니던 때이기도 했다.


새 백팩을 사야겠다고 거의 주문을 외우다시피 되내이며 가방을 찾았으나 

좀처럼 마음에 드는 가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지하철 환승 통로를 이동하던 중 앞서 가던 남자 사람의 가방을 보고 완전히 꽂혀버렸다.

뒤에서 슬쩍 가방 사진을 찍었고

인케이스라는 브랜드를 처음 알게 됐다.

홈페이지의 소개 영상과 문구를 보니

매우 유명하지만 나만 모르는,

IT 업종에 종사하는 얼리어답터들이 선호하는 느낌적인 느낌이어서

아이폰을 쓰는 사람이 괜히 힙해보였던 당시 나의 허영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공식 홈페이지에 내가 찜한 모델은 없었다.

바로 네이버 쇼핑으로 들어가서 수십 분을 투자한 끝에

열몇 번째 페이지에서 찾고야 말았다.

단종이 된, 대중적이지 않은 사이즈의 검은색 백팩이었다.

가방을 찾고 무척 기뻐서 아내에게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백팩 역시 많은 걸 넣고 다녔다.

처가댁이 약수에 있고 우리 신혼집이 불광이던 시절,

도정기로 쌀을 찧어먹는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10kg짜리 나락 포대를 약수에서 불광으로 날라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락을 우리 집으로 주문하면 됐는데 왜 그랬지?) 

일상적으로 노트북과 책과 인감도장과 OTP와 각종 잡동사니들이

한 번 가방에 들어가면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이동한 것처럼 다시 나오는 일이 없었다.

여행을 갈 때면 가방은 터질 듯 빵빵했다.


불행히도 두 번째 백팩은 빵빵한 것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지퍼를 고정하는 실 매듭이 약해서 결국 끊어졌고

지퍼가 덜렁거리며 가방 안이 훤히 보이게 됐다.

몹시 마음에 들었던 가방이고, 어렵게 구했으며,

마구 굴려도 튼튼하기만 했던 첫 번째 가방의 사용 기간을 생각할 때

이대로 버릴 순 없어서 수선을 맡겼다.


며칠 뒤 말끔히 수선된 가방을 보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다시는 네게 나락을 지우지 않겠다며 말을 건넸다. 

(사실 그 이후로 몇 번은 실어 날랐던 것 같기도...미안 가방)

그러나 얼마 전 안타깝게도 같은 부위가 다시 터졌고

한 번 더 수선한다고 해서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여전히 가방에 물건을 빵빵하게 넣는 때가 잦았으므로)

새 가방을 사기로 했다.


두 번째 가방을 살 때처럼

마음에 쏙 드는 가방을 찾느라 엄청난 시간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하철 환승 통로에도

네이버 쇼핑에도 꽂히는 가방이 없었다.


한동안 공짜로 받은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 다녔다.

적당한 걸 사면 될텐데

뭐 그리 대단한 가방을 사겠다고

손의 자유, 한쪽 어깨의 자유를 빼앗으며 사는지 혼자 쯧쯧거리면서도

타협할 수 없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가방에 대한 기준에

선택 장애라는 쉬운 이름을 붙이고 미루고 또 미루며 지냈다.


그러다 문득,

정말 뜬금없이

이렇게 백팩 없이 살 수 없다고 결심하고

출근길에 폭풍 검색 후 바로 질렀다.

(그리고 정말 우연히, 그 날 바로 브리프 케이스의 어깨끈 고리가 뚝 끊어졌다! 소름...)


집에 와 박스를 뜯어보니 적당히 각지고 모양 잘 유지되고 튼튼해 보이는 심플한 외관이 좋았다. 

지퍼는 부드럽게 움직이고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수납공간이 엄청나게 많다.  

룰루랄라 브리프케이스에 넣고 다니던 물건을 옮겼는데

커다란 호수에 돌멩이 하나 던진 기분이랄까.

비어있는 가방 속 공간이 너무나 허전해서

두꺼운 책 한 권을 더 넣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수많은 수납공간에

굳이 물건을 나눠 넣고 보니

어디에 뭘 넣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괜히 큰 걸 샀다는 후회보다는

앞으로 이 공간에 채워 넣을 물건과

그 물건에 담길 일상의 맥락이 기대된다.

회사, 나들이, 여행, 공부, 장보기에 쓰일 가방과

쓰이는 일에서 만날 사람과 상황들,  

내 안에서 펼쳐질 생각과 감정이 어떤 그림을 그려낼까?


겨울 방학 후 새 학년 첫 등굣날처럼 어떤 새로운 일을 만날까 설레고,

여름 방학 후 새 학기 첫 등굣날처럼 어제와 오늘은 또 어떻게 다를까 두근거린다.

설레고 두근거리는 하루가 담긴 가방이 

노트북과 책 2권이 들었는데도 가볍게 느껴지고

마음이 든든하다.


이 기분을 공유하고 싶어 

오늘 처음으로 새 가방을 메고 회사에 출근해서 보란 듯이 티를 냈는데

다들 내 가방을 보아 줄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흑)

글로 아쉬움을 달랜다.

새 가방을 멘 나의 뒷태. 화질이 별로다... 분발하라 아이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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