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2편
마음을 둘러싼 두 세계의 환상적인 셔플링
이번으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는 것은 두 번째다. 작년 겨울 섬에서 생활하며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영향은 어마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탐독했고 “Danny Boy”를 지겹도록 들었고 소설가가 되기를 꿈꿨고 소설의 힘을 믿게 되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이성의 세계에 처음 눈을 뜬 아이처럼 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통해 소설에 눈을 떴다. 언젠가 다시 읽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책을 덮었던 게 기억난다. 일 년도 채 안돼서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첫 기억이 강렬하게 남았던 탓인지 다시 읽었을 때의 충격은 처음의 그것만 못했다. 그래도 이 소설이 훌륭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오히려 흥분이 가라앉은 덕에 소설을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 년 사이에 소설을 읽어내는 능력이 성장한 덕인지도 모른다. 원래 읽은 책을 다시 읽지 않는 편인데 재독하는 것도 나름 괜찮은 것 같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이언스 픽션, 사변소설, 판타지 등 어느 것도 정확히 이 책의 장르와 들어맞지 않는다. 다양한 요소를 모두 고려하여 판단하자면 역시 이 소설의 장르는 “무라카미 하루키”다. 자기만의 색채가 없는 소설가가 어디 있겠냐만, 이렇게밖에 설명하지 못하겠다. 장르 따위의 관념적인 이야기는 접어두고 자세한 리뷰를 시작하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하며 서사가 전개된다. 세계의 끝은 견고한 벽에 둘러싸인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마을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주인공인 “나”는 천천히 여기에 적응하고 있다. 다만 마을은 기묘한 구석이 있다. 완전하고 완벽한 벽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가 하면, 누군가가 마을에 들어가려면 그림자를 떼어내야 한다. “나”는 꿈읽기라는 직업을 배정받아 졸지에 꿈을 읽게 된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의 끝은 뭔지는 몰라도 환상 세계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현실 세계다.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배경이 현실이어도 일어나는 일은 꽤 비현실적이다. 주인공인 “나”는 계기판이나 패널 하나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린 다음 캄캄한 동굴을 지나 나이가 지긋한 한 박사에게 의뢰받은 업무를 처리한다.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짐승의 두개골을 선물로 받는다. 박사를 만난 이래로 평탄했던 나의 일상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솜씨는 교묘하다. 독자가 마치 거기에 있는 것처럼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뛰어난 작가라면 기본적으로 갖춘 능력일 테다. 나는 특히 신박한 비유에 감탄했다. 작가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지만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비유를 구사한다. “짓뜯겨 나간 하늘의 조각이 오랜 시간에 걸쳐 본디 기억을 잃어버린 것 같은 칙칙한 파랑이다.” 이런 식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이야기하면서 그의 유머를 빼놓을 수 없다. 알고 있는 표현인데도 책을 읽으며 실실 웃었다. 하루키의 유머는 담백하고 세련돼서 매력적이다. 따지고보면 말장난에 불과한데, 그 말장난이 고급지다. 독자를 웃기기 위해서 무슨 일을 억지로 꾸며내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을 두고 작가가 생각하기에 웃긴 측면을 포착하여 덤덤하게 설명한다. 무표정으로 상대를 웃기는 자가 진정한 고수다.
* 글은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