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
이곳은 이제 여름이 끝나가는 듯하다.
힘겨운 여행의 노곤함으로 자다 깨다를 반복 하며 하루를 보냈다. 종일 비가 내리고 집안의 공기도 차갑게 느껴져 줄곧 10유로를 주고산 가운을 걸쳐 입고 커피를 세잔이나 내려 마셨다.
그냥 몸과 마음이 너무 추워서 뜨거운 커피로 온도를 높이고 싶었다.
정신을 좀 차려보니 아이들에게 점심을 차려줘야 하는데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일주일간의 여행으로 냉장고엔 먹을만한 것이 없어서 비옷을 입고 간단히 장을 봐왔다.
한국서 가져온 건미역을 불려놓고 좋은 퀄리티의 소고기와 마늘을 넣고 미역국을 끓여냈다.
냉동고에는 지난주에 만들어 놓은 슈니첼(한국의 돈가스와 비슷)을 꺼내어 코코넛 오일을 두른 후 튀겨내었다.
곧 뒤셀도르프로 이사 가는 이유로 일부정리한 상자들로 쌓여있고 여기저기 어수선한 집가운데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다.
어이들도 6학년과 9학년이 시작된다.
모든 일상의 반복은 감흥이 없고 지루한 듯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일상은 조금 더 힘겹고 약간의 긴장감을 갖게 한다. 언어와 행정적인 일들이 한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반복되는 일상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단 하루도 같은 날은 없다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며 안고 살아가게 하는 곳이다.
이러한 환경에 던져진 나를, 오늘의 나를 만나고 보내기를 반복한다.
육체적인 힘듦과 정신적인 중압감은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비할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때 보다 나를 알고 만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렇게 고민했던 적이 있는가?
대부분의 내게 일어난 일들은 나로 인해서 생겨난 결과들이다.
타인 때문에 벌어졌고 남 탓으로 여겼던 나를 되짚어 보고 반성케 한다.
나를 인정하고 버려야 할 것 울 버릴 줄 알고 걸어 나갈 때만이 나를 책임지고 믿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이 나이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또한 감사하다.
오늘 밤은 잠을 일찍 잘 수 있을 거 같다. 몸과 마음을 최선을 다해 살아낸 하루였으니 말이다.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선하고 밝은 에너지에 흘러가기를 기도하며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고 다독이며 나를 정화시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