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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우리 Jun 06. 2024

풀들의 명의, 엄마

부모와 자식은 같은 취미를 가지지만, 함께 할 시간은 없다. 

20대의 나는 엄마의 모든 취미 생활이 유난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집에 있을 때는 늘 

식물을 가꾸고 흙을 만지고 야채를 씻고 다듬었다. 

쉬는 날엔 다람쥐보다 더 바쁘게 

이 산으로 저 산으로 등산을 갔다. 

엄마의 등산 메이트들이 함께 갈 수 없을 땐 

엄마는 혼자라도 기어이 산을 올랐다. 

나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테라스에서 

하루 종일 다육이를 만지고 심고, 

식물을 가꾸느라 새까맣게 타버린 

엄마의 손등이 미워 보였다. 

가끔은 나보다 저 수십개의 식물들을 

더 정성껏 키우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곤했다. 

늦잠을 잘 수 있어서 설레는 주말마저도 

엄마는 등산을 가자고 나를 깨웠다. 

뭐가 그렇게 다 귀찮았는지 그럴때마다 

나는 대놓고 등을 돌리며 못 들은척 눈을 꽉 감았다. 


세월이 흐르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20대의 나는 30대 후반, 곧 마흔을 앞두고 있다. 

그런 지금 나의 눈앞에 보이는 건, 열 가지가 훌쩍 넘는,

갖가지 다른 뽐새를 자랑하는 화분들이다. 

햇볕이 들지 않는 방에 있는 화분은 

잠시라도 햇볕을 받고 쑥쑥 커주길 바라는 마음에

아침마다 햇살 드는 곳으로 옮겨준다. 

고사리의 잎들이 풍성하길 바라며 

연약하게 금방 자란 연두빛 새잎을 만지며 웃어본다. 

또한 엄마의 자궁에서 온 힘을 다해 

태어나는 핏덩이를 응원하듯이 

딱딱한 씨앗을 뚫고 흙 속을 헤치고 솟아난 새싹이

대견스러워 한참을 쳐다보곤 한다. 


전세 계약이 완료될 즈음 

나는 새로운 나의 터전을 고르는 조건으로 산을 선택했다. 

집 근처에 산이 있었으면 좋겠어. 

흙을 밟고 숨을 쉬고 싶어. 

풀내음을 맡고 하늘을 보며 깊게 숨을 틔워야 살 것 같아. 

가슴이 너무 답답해. 

이런 생각을 했다. 

결국 나는 그토록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를 닮은 중년이 되어가고 있다. 


그 사이 엄마는 몇 번의 허리 디스크 수술과 

물이 찬 무릎의 통증, 손목의 힘줄 수술 

그리고 발견된 뇌의 종양을 줄이는 방사선 치료로 인해 

늙고 낡아졌다. 

엄마는 이젠 등산을 다닐 수 없다. 

게다가 도저히 관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더이상 화분을 사들이지 않는다. 

엄마의 화분들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그마저도 이웃과 친구들에게 힘들었던 

갱년기를 버티게 한 당신의 분신같은 

애틋한 존재들을 나누어 준다. 

나는 이제서야 그 맛에 빠져 사는데.

이제야 엄마가 키우던 식물의 이름을 알고 

그것들이 얼마나 정성을 쏟아야 

꽃을 내어주는 아이들인지 알게 되었는데. 

슬프게도 자식은 부모와 같은 걸 함께 할 수가 없다.


다 늙어 백발이 돼 버린 엄마를 찾아가 

예전과는 다른 대화를 한다. 

쳐다보지도 않았던 저 다육이가 너무 예쁘다고, 

몇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저 꽃의 향기가 

집안을 밝게 비춘다고. 

다 죽어가던 식물의 흙을 털어내 물꽂이로 살려낸 엄마는 풀들의 명의 중의 명의라고 칭찬을 한다. 

“내가 키우는 애들은 이렇게 예쁘지 않아. 

엄마는 정말 식물을 잘 키우는 것 같아.”

이런 나의 칭찬에 엄마는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키운 것 중에 제일 예쁘게 잘 큰건 너야.”

괜히 시큰한 콧물을 한번 훌쩍 마시고 

빨개진 눈을 비비며 딴청을 피워본다. 

큰 산같이 어른이었던 엄마가 

막 자란 연두빛 새싹같은 아이의 미소를 짓는다.

엄마가 새싹이 된다면 이젠 내가 큰 산이 되어야지. 

그렇게 든든히 그 새싹을 지켜야지. 

어린 씨앗이었던 나를 큰 산으로 키워 준 엄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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