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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미치

2. 꼬리를 말고 도망치자

by Han

공항에 내리자 물밀듯이 사람이 빠지기 시작했다. 히로시마 공항은 인천 공항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작은 공항이어서, 비행기에서 내리고 20분이면 입국 수속까지 마칠 수 있었다.


버스가 늘어서는 공항의 창밖을 바라보다가 오노미치로 향하는 버스 티켓을 끊었다. 정확히는 오노미치로 직행하는 버스 티켓은 없어, 우선 가장 가까운 미하라 역까지 이동했다.


어색한 풍경이 눈에 스쳤다. 집중할 만한 경치는 아니었다. 여행지를 잘못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매한 풍경. 시골인가 싶으면 도시, 도시인가 싶으면 시골인 곳이었다.


무엇보다 성일은 한국 뉴스를 보고 있었다. 우연히도 그 날은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재판관의 이야기와 앵커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란스럽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미하라 역에서 오노미치로 가는 전차에 오르자마자 탄핵이 선고되었다. 달리는 전철 속에서, 그토록 조용한 일본인들 사이에. 도망친 한국 남자는 시대의 격변을 마주하였다.


잠시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창 밖을 바라보니 전철은 바닷길을 달리고 있었다. 성일은 햇빛이 바다에 부서진다는 표현을 좋아했다. 마치 빛을 잘게 쪼개어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 같아 자애롭다고 생각했다.


창밖에서 시선을 돌리자 교복을 입은 한 여고생과 눈이 마주쳤다. 누가 봐도 서로에게 관심없다는 듯 동시에 눈을 피했다. 성일은 그렇게 느껴진 소외감이 좋았다. 방금까지 의심했던 이 도피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ベッチャーラーメンと、チャーハン小でお願いします”

(벳챠 라멘이랑, 작은 볶음밥 주세요.)


전철에서 내린 후 가장 먼저 간 곳은 식당이었다. 오노미치는 라멘이 유명하다고 해서 무작정 가장 역과 가까운 라멘집으로 향했다.


“,,, 짠데”


짰다. 맛이 있냐 없냐로 보면 있는 편이었지만, 매운 라면에 길들여진 성일의 입맛에는 짠 맛이 너무 두드러졌다. 짐을 들어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바닷 바람이 앞머리를 스쳤다. 이것마저 짜다 싶었다.


급하게 예약한 숙소는 역과 거리가 있어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걷다보니 형형색색의 컨테이너가 모여있는 곳이 있었다. 별안간 빵 냄새가 난다 싶어 들여다 보니 컨테이너 자체를 상점가처럼 꾸며 놓고, 이런 저런 가게나 식당이 늘어서 있었다.


홀린 듯이 베이커리에 들어가 초코 소라빵과 피자빵, 작은 치즈 머핀을 샀다. 바다를 보고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싶어 물어보니 컨테이너 반대편이 바다와 맞닿아있고, 테라스를 만들어 책상과 의자를 놔두었다고 안내받았다.


파도가 치는 소리가 녹아내렸다.


빵을 먹자니 멀리서부터 갈매기가 돌진해오고 있었다. 잡아먹히는 게 아닐까 싶은 스피드로 날아오니 허겁지겁 빵을 입에 넣고 갈매기 먹이용 머핀을 반쯤 남겨 두었다.


냐옹


하는 울음 소리에 맞은 편 의자 밑을 바라보니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갈매기를 사냥하려는 것 같이 잔뜩 몸을 웅크리며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닷 바람을 맞은 고양이의 털은 날서게 뭉쳐 삐쭉 솟아있었다.


데크에 앉은 갈매기에게 머핀을 던졌다. 순식간에 물어 다시 날개를 펄럭이는 순간 고양이가 달려들었다.


고양이가 참 육중하다 싶었는데, 역시 갈매기의 비행을 막는 건 무리였다. 철푸덕 소리를 내며 넘어진 고양이는 낑낑대는 소리를 내다 포기한 듯 풀썩 주저 앉았다.


고양이가 빵을 먹어도 되던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빵 집으로 돌아가 소시지 빵을 샀다. 가운데에 늘어진 소시지를 쭈욱 빼고 한 입 물었다.


짭짤하다.


고양이가 이런 걸 먹으면 안된다 싶기도 했지만, 길고양이에게 굳이 그런 걸 따질 필요는 없지 싶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고양이에게 남은 소시지를 던졌다.


“잘 먹네…”


역시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실패를 마주해도, 배는 고픈 거구나 싶었다.


허겁지겁 먹는 고양이를 뒤로 하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도보로 역에서 25분 정도 걸리는 숙소였다.


“Hello!”


반가운 인사를 건넨 카운터에는 한 중국인 아주머니가 넉살 좋게 웃고 있었다.


“Do you wanna have a drink?”


그렇게 묻고는 손가락으로 로비 옆 바를 가르켰다.


“It's a welcome drink.”


마시고 싶다는 표시를 하자 아주머니는 터벅터벅 걸어가 데킬라를 집었다. 맥주 한잔이 아닐까 싶었는데 의외의 고량주가 나오니 조금 당황했다.


뜨거운 목넘김을 뒤로하고 방에 들어왔다. 8인용의 게스트 하우스는 북유럽 풍의 나무 재질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문에는 드림캐쳐가 흔들리고, 침대를 가리는 커튼은 무광의 검은색이었다.


이제 해가 지기 시작한 5시, 방에는 짐만 남아 사람없이 조용했다. 가방을 대충 풀고 칫솔과 치약을 꺼내 샤워장으로 향했다.


좁은 샤워실에서 뜨거운 물을 틀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지.


이른 새벽 텅 빈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생각치도 못한 풍경에 들어와 있었다.


상사의 얼굴을 떠올린다.


올해 마흔 다섯이 된 서 차장은 스스로 노처녀라고 부르며 푸념하는 걸 좋아했다.


언제나 울상 같이 좋은 남자가 없다, 외롭다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며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같이 동정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을 비하하면서 동정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남들에게는 한 없이 냉정한 사람이었다.


냉정. 아니, 혐오를 했다. 불쌍한 자신 이외의 모두를 혐오했다.


모두가 그녀에게서 떠났다. 특히 작년 승진 이후 ‘능력있는 자신을 동정하는 멋진 나’라는 이미지를 연기하며, 그나마 남아있던 후배들도 모두 떠나버렸다.


그럼에도 성일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이유는 성일 역시 그녀를 동정했기 때문이다. 자기 혐오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성일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성일이 마지막에 도망친 것은 자기 연민으로 남을 탓하는 그녀의 모습에 동족혐오를 느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샤워기를 끄고 방으로 돌아왔다.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하고 눈을 감았다. 긴장과 눈이 함께 풀렸다.


꿈을 꾸었다. 허리까지 검은 물에 잠겨 있었다. 앞에는 수평선이, 뒤에도 수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성일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를 느꼈다, 손 발이 떨리고 있었다.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닥-닥-닥


그렇게 눈을 떴을 때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2층 침대에 올라가는 외국인의 모습이 보였다. 닥-닥-닥. 삐꺽거리는 사다리는 저 사람의 다리에 비해 얇지 않나 싶었다.


배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은 8시. 연 가게가 있나 싶어 뒤져보다 우선 오노미치 역 왼쪽에 위치한 상점가로 향했다.


그렇게 잊을 수 없는 24시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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