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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미치

1. 출국

by Han

“죄송합니다.”


한국에 남기고 온 마지막 한마디였다. 모두가 온화하게 보내는 것만 같은 평화로운 날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지옥이 있고, 그 문이 열리는 시점도 제각각이다. 그 날의 지옥문은 성일에게 열렸을 뿐이다.


흘겨지는 눈들을 피해 집으로 돌아온 성일은 무작정 스카이 스캐너를 켰다. 가장 출국 시간이 가까운 비행기를 찾아 예약했다. 도착지는 일본. 히로시마.


디자이너인 성일에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미감이 비슷한데 결과적으로 다르달까. 아무튼 묘한 기시감이 있는 나라였다.


“히로시마면 그, 핵이 떨어진 곳 아니야?”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가장 오래 알고 지낸, 가장 믿고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있었던 이야기는 차치하고, 그냥 히로시마에 간다고 했다. 언제 돌아온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돌아올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간의 사정으로 대충 이해한 듯 말을 흘리던 친구는 히로시마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과 일련의 편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핵이 떨어진 곳.


그 파괴적인 울림은 한국인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 걸까. 적어도 성일에게는 큰 의미없는 파동이었다. 아직까지는.


출국 수속을 마치고, 탑승을 기다리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비행기가 늘어진 모습은 수많은 떠남과 이별이 있다는 걸까. 그렇다면 난 지금 무엇과 이별하고 있을까. 혹은 무엇으로부터 떠나고 싶을까. 성일의 머릿 속은 평소에는 떠올리지 않을 오글거리는 단어와 물음에 잠기고 있었다.


꼬르륵


하는 소리와 배고파졌다. 사람은 어떤 일을 겪었던, 결국 배가 고픈 거구나. 밥을 먹어야 하는구나. 피식 웃으며 롯데리아에 향했다.


성일은 언제나 공항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루틴이 되어버렸다. 오늘 같은 날에도 관성적인 사람이구나 스스로 되뇌었다.


“진짜 쓸모가 없네요. 당신.”

“그냥 하라는 대로 하세요. 생각은 내가 하니까 손만 움직이면 되는데, 그걸 왜 못하지?”


그래서 하라는 대로 했더니 시킨 사람이 하라는대로 했다고 매도하면, 난 어떤 선택을 해야했던 걸까.


버거의 치즈만큼이나, 늘어지는 속이었다.


탑승구 앞으로 돌아와 다시 풀썩 앉았다. 발치에는 작은 배낭 하나. 배낭에는 위 아래 옷 3벌과 속옷 4벌. 뛰쳐나온 집에서 툭하고 튀어나온 짐.


배가 불러서일까. 마음이 더 허해졌다. 그제서야 허한 여행 계획, 아니 도피 계획을 세워야지 싶어 핸드폰을 들었다.


히로시마, 핵이 떨어진 곳.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부서진 돔과 핵과 관련된 많은 관광지가 튀어나왔다.


“으…음”


성일은 되물었다. 난 진짜 이 폐허와 잔재로 도망치고 싶은 걸까?


[근교]


그렇게 [근교]를 검색하자, 히로시마 근처의 많은 소도시 여행 코스가 나왔다. 이런 곳, 저런 곳을 뒤지다보니 ‘오노미치’라는 도시를 발견했다. 눈에 익은 한자.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외운 보람이 있는 순간이었다.


“오노미치(尾道). 꼬리? 길?”


꼬리(尾)라는 뜻을 생각하자마자 퍽 우스웠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 같은 모습과 참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 가보지 뭐.”


도망치자. 여기에서 당장. 그렇게 생각했다.


“히로시마 행, 탑승 시작하겠습니다.”


하이톤의 스튜어디스가 외치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작은 배낭을 한 쪽 어깨에 들쳐매고 길어지는 줄에 몸을 실었다.


완연한 봄. 벚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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