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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May 02. 2016

런치 박스
사랑은 커리를 타고

잘못 탄 기차가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줄 수도 있다

도를 여행하던 기간 동안 극장을 두 번 찾았다. 힌두어를 못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 인도 상업 영화는 아주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세컨드 랭귀지인 영어와 힌두어를 섞어서 쓰기 때문에 스토리를 따라잡는 데에 무리가 없다. 단순한 스토리는 차치하고라도, 일단 신명 나는 춤과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자세가 준비 되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영화가 히어로물이 아니고, 유럽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영화가 예술영화가 아니 듯이 인도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영화가 '마살라 무비'는 아니다. 마치 인간인지 선녀인지 분간 못할 여배우가 나와 흐드러지는 춤과 노래를 보여 주는 영화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는다면 <런치박스>라는 작품에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런치박스>는 발리우드식 춤과 노래가 등장하지 않는 순수 드라마/멜로/휴먼 장르의 잔잔한 영화다.  



 영화는 여주인공 일라가 남편을 위해 만든 도시락이 생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잔에게로 잘못 배달되면서 시작된다. 일라는 남편과 소원해진 관계를 극복하고자 잔뜩 힘을 줘 맛있는 도시락을 만들지만, 그 도시락은 아내와의 사별 후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는 권태로운 중년의 남자 사잔에게로 배달된다. 둘은 실수로 배달된 도시락을 계기로 지속적으로 쪽지를 주고받으며 교감을 해나간다. 음식이 짜다는 사잔의 쪽지에 매운 도시락으로 보답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처음엔 그저 우연한 장난으로 시작됐던 도시락 필담은 점점 소통의 깊이가 더해지고, 결국 둘은 일상에 활력을 얻으며 깊은 애정을 느끼기에 이른다. 펜팔이나 메신저로 연애를 시작하듯이.



 밥을 나눠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에게 소통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고루한 소재일 수도 있는 '도시락'과 '편지'를 통한 연애물이라니, 다소 유치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영화는 세련된 방식으로 이 익숙한 소재들을 가지고 놀며 1시간 반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주체적으로 이끈다. 관객 또한 객체가 되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따라 내내 미소 짓게 된다. 이 영화에는 '인도의 3대 칸'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또 다른 유명한 '칸'인 이르판 칸이 주연으로 연기한다. 그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장년의 파이 파텔 역으로 우리나라에 얼굴을 알렸고, 이전에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도 출연한 바 있다. 그는 권태롭고 까칠한 중년의 남자로 분했는데, 사랑에 빠져 밝게 변화하는 순간을 섬세한 결로 잘 포착해냈다. 인도의 제시카 고메즈라는 님랏 키우르 역시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 주고 있으며, 사잔의 직장 후배 샤이크 역으로 출연한 나와주딘 시디퀴는 이르판 칸과 매번 같은 씬에 등장하면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고 그 존재감을 기대 이상으로 잘 보여준다.   



 '다바 왈라'라고 불리는 인도 뭄바이의 도시락 배달부들은 무려 5천 명이 넘는다고 한다. 매일 아침 집에서 아내들이 만든 도시락을 수거해 기차로 옮겨 직장에 있는 남편들에게 점심시간 전에 도시락을 배달하는 뭄바이 고유의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벌써 120년이 넘은 전통이란다. 포브스지는 이 도시락이 잘못 배달될 확률이 무려 100만 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는데, 거의 모두가 문맹인 다바왈라들은 도시락통 위의 색깔과 기호로 아주 정확하게 그 주소와 수취인을 구분한다고 한다. <런치 박스>는 이처럼 뭄바이에 존재하는 아주 독특한 문화인 도시락 배달, 인도 음식, 뭄바이 대중교통의 아주 바쁜 일상을 잘 어울러 인도의 문화를 흥미롭게 느끼게 해준다. 모든 대도시는 늘 북적이는 만큼 외롭지만 '그래도 이곳은 인도'라는 듯한 오리지널리티를 잃지 않는다고 할까.  



 또한 영화 곳곳에 유머 요소를 섬세하게 배치한 것을 알 수 있다. 일라가 매일 대화하는 윗집의 얼굴 모르는 이모를 등장시킨다던지, 샤이크가 사잔을 귀찮게 따라다닐 때 음향을 교묘하게 편집한다던지 말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잔잔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무리한 휴머니즘을 억지로 주입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지만 과하지 않고, 감동적이지만 닭살 돋지는 않는 적당한 온도를 잘 유지하고 있는 영화가 흔치 않은데 말이다. 편견이나 기대 없는 소박한 소통과 사랑이라는 의미 면에서도 적잖은 무게감이 있고, 결말을 닫힌 듯 열린 듯 열어두고 서스펜스를 주려 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인도 영화를 원래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큰 영화를 주로 접하게 되다 보니 플롯 면에서는 완전히 만족한 적이 없었다. 항상 클리셰가 포진해 있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곤 했는데, <런치 박스>는 작가의 인도 영화를 접하고 싶었던 나를 아주 흡족시켜 주었다. 인도와 인도 영화에 대한 편애가 가득한 리뷰였지만 그래도 충분히 볼 만한 영화인지라, 인도 영화가 익숙지 않은 관객들에게도 추천을 해주고 싶다. 혹시 알겠나, 영화에 등장하는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줄 수도 있다'라는 속담처럼 예상치 못하게 당신을 인도 영화의 세계로 들여보내 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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