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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May 05. 2016

늑대 아이

아이를 키우며 엄마도 함께 자란다

 명 자신들을 친절히 대해주었을 리 없는 대도시에서 여자와 남자는 각자의 생계를 꾸리며 외롭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이라는 이름의 필연이 두 남녀를 마주치게 하고, 그 마주침은 연인 공동체의 시작을 만들어낸다. 알고 보니 남자가 늑대 인간이었대도 여자는 개의치 않는다. 장애물은 서로를 더욱이 용감히 사랑하게 도울뿐이다. 늑대 인간과 여자는 사랑의 결실로 딸과 아들을 낳는다. '이렇게 네 가족은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맺음한다면 좋겠지만, 어디 삶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던가. 늑대 인간은 처자식을 먹이기 위해 사냥을 하다 도시의 차가운 개천 바닥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는 검은 봉투에 담겨 쓰레기 차에 실려가는 남편의 사체를 보고 오열하지만, 이미 벌어진 비극 앞에서 최소한의 애도 시간만을 갖고 이내 씩씩하게 홀로 어린아이들을 양육한다. 젖먹이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하나)에겐 절망할 일말의 기회도 허락되지 않는다.



 모든 외로움을 걷어내고 서로의 허물마저 덮는 것은, '사랑'이라…. 



 하나는 두 아이 유키와 아메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간다. 인적이 드물어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울 수 있는 곳을 찾아 엉겁결에 귀농을 하게 된 것이다. 고작 이십 대 중반일 하나의 여린 등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많은 짐들이 그녀에게 얹혀 있다. 가장 평범해 보이던 한 여자가 가장 비범한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으니, 그녀의 삶 역시 비범해져야만 할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제 엄마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고 마구마구 자라나고, 밭에 심은 작물들은 맘처럼 자라 주지를 않는다. 귀농한 미혼모, 게다가 늑대의 자식을 둘이나 홀로 키워야 하는 하나의 고생은 말도 못 하게 눈물겹다.



 그러나 엄마는 여자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하나 역시 여린 소녀의 모습을 탈피하는 과정을 거치며 시골 정착 초기 여러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진화한다. 이웃의 도움을 받아 작물을 수확하고, 직업을 갖고, 아이들을 교육하며 안정된 생활을 누린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아이들은 저절로 쑥쑥 자라나고,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또래 친구들을 만나며 사춘기를 겪는다.



 결국 아이는 자라나 어른이 되기 마련이고, 엄마도 함께 성장한다.



 이 영화의 미덕은 '양육'이라는 보편적 소재를 아름답게, 진지하게, 유쾌하게, 그러나 특별하게 풀어냈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십분 활용해 인간이 늑대로 변화하고,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처럼 고운 영상에 담아낸다. 그 모든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을 도시가 아닌 대자연으로 선택한 것 또한 무척 영리했다는 생각이다. 특히 아이들이 성장통을 겪으며 어린 시절의 기질을 버리고 변화하는 모습을 비와 눈 같은 자연현상에 대비해 풀어내는 방식은 은유적이고 시적이다. 그것은 1년 내 이루어지는 사계절의 순환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아이들이 어미의 둥지를 떠나는 것 또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또한 아이들과 엄마가 겪어내는 성장통이 얼마나 호된 것인가를 극대화해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영화의 러닝타임 120분을 오롯이 함께 느낀다. 하나의 슬픔에 함께 아파하고, 유키와 아메가 귀엽게 노니는 모습에 함께 즐거워하고, 아이들의 상처를 함께 염려하다 보면 영화는 막바지에 이르러 있다. 영화의 중후반부쯤, 하나의 연애가 시작되던 영화의 초반부를 떠올려 보면 내가 마치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고생한 것처럼 아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이는 애니메이션 치고 짧지 않은 120분의 러닝타임을 전략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엄청난 시간과 감정과 노동의 밀도를 지닌 것이지만, 결국 이렇게 고된 만큼 즐거운 나날도 다 지나고 나면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는 은유이자, 120분에 아이들의 성장을 함축적으로 담아내려는 감독의 노력이다.



 자식들을 키워내야 하는 세월은 함께 한 사랑의 시간에 비해 너무나 길고, 사랑이 주었던 기쁨에 비해 하나가 홀로 겪어야 했던 고통은 너무나 크다. 남편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 모든 고된 상황을 모성과 추억 하나만으로 견뎌내야 했던 하나의 고통과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성장통,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이 마무리되는 듯 보였을 때 이루어진 자식들과의 이별은 그 밀도가 너무나 농밀해 도무지 감성을 자극받지 않을 수 없다.



 영화 말미에는 등장인물 모두들 서로의 품을 떠나 산으로, 집으로, 학교로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가족의 구성원들이 한 집에서 아웅다웅하며 살아가는 일조차 '추억'이란 이름의 과거가 된 것이다. 추억 그 자체에는 힘이 없지만, 그 추억이 주는 긍정적인 에너지에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다. 추억은 우리를 그 세월로 다시 돌려놓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 발 붙인 이곳에서 더 잘 살아가게는 해줄 수는 있다. 이별은 아팠을지 모르나, 엄마의 희생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메와 유키의 이후의 생은 적어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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