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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Apr 30. 2016

비우티풀

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Biutiful'하므로

 화 <비우티풀>은 바르셀로나 외곽에 사는 하류 인생, 그중에서도 죽음을 준비하며 아이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바라본 '바르셀로나'와 '하비에르 바르뎀'은 우디 앨런 감독의 그것과는 아주 상반된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의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와 낭만적 로맨스로 위시된 관광객의 눈에 비친 환상의 도시라면, <비우티풀>의 바르셀로나는 현지인들도 제대로 모를, 생계의 잔인함과 우울이 점철된 도시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카사노바 예술가 역을 찰지게 연기했던 하비에르 바르뎀은 이 영화에서 인생의 무게를 어깨에 잔뜩 얹은 가장으로 분한다.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 분)은 불법 이민자들에게 취업을 알선하는 중개인이자 죽은 자의 목소리를 가족에게 전해주는 영매이다. 그의 아내는 조울증으로 엄마의 역할은커녕 제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고, 그는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리 유쾌하지 않은 방법으로 집에 빵을 사다 나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3개월 안에 죽게 된다는 비보를 접한다. 그는 죽고 싶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기에 그는 일생을 아등바등 살아냈을 것이다. 어린 아들의 말처럼 '아버지 없는 삶이 얼마나 후진지'를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 이대로 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스포일러 있음) 하지만 결국 그는 죽는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을 똑똑히 목격하기까지 한다. 자신에게 푼돈을 쥐어줬던 그 능력은 생의 마지막 순간, 잔인하게 제 할 일을 다 한다. 



 영화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같다.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수수께끼 같던 첫 장면을 이해하게 되고, 그와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욱스발은 이미 사망 당시의 아버지보다 많은 나이를 먹었다. 그렇게 험하게 살아온 늙은 아들이 자신보다 더 젊고 고운 청년의 모습을 한 아버지와 수줍은 듯 대화를 나눈다. 배경은 부엉이의 사체가 놓인 하얀 설원이다. 라벨의 음악이 흐르고, 감독은 이 영화를 자신의 아버지에게 헌정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한 영화 혹은 상황은 비극적이지만 가해자가 없어 더 아픈 영화를 좋아한다. 인생도 그렇지 않나. 생을 뒤집어 놓을 만한 큰 사건들은 거부하기도 전에 이미 벌어져 있고, 나를 비롯한 모두가 고통받는 와중에도 잘못을 돌릴 이 없어 더 곤란한 상황을 우리 모두는 왕왕 겪어왔다. <비우티풀>도 그렇다. 거부하기도 전에 병은 이미 제 몸을 잠식해 있고, 열심히 살려는 아내는 조울증에 시달리고, 누군가는 가족을 남겨둔 채 추방당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졸지에 2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다. 그 누구 하나 멀쩡하지 않다. 모두들 제 의지와는 별개로 고통받는다. 굳이 그 고통의 원흉을 따지자면 자본에 의해 굴러가는 이 비인격적인 사회일까. 이 영화는 제 삶을 그나마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도시 빈민들이 그 프레임을 그득 채운다. 



 이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시종일관 역겹고 우울한 장면들을 보여주지만,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나고 나면 '아름답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 아름다움의 느낌은 정확한 철자로 다듬어진 'Beautiful'이라기보다는 비록 철자는 틀렸으나 날 것처럼 아름다운 'Biutiful'에 가깝다. 때로는 잘못되고 틀린 것이 사물의 본질을 더 정확히 꿰뚫을 때가 있다. 많이 배우지 못한 아버지는 기본적인 영단어 철자 하나 제 제대로 딸에게 알려주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가장 날 것의 'Biutiful'한 마음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처음과 끝, 욱스발과 그의 아버지도 공유한 마음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비극을 맞이했던 모든 등장인물들은 결국 제 삶을 잘 수습했을지, 모든 아기와 아이들은 앞으로 행복하게 성장했을지에 대한 미래에 관한 것들은 굳이 알고 싶지가 않다. 결국 제 의지와는 별개로 벌어진 자식들과의 이별과, 그것과 맞닿은 아버지와의 만남의 순간이 너무나 찬란하여 나는 잠시 생과 죽음이 등을 맞댄 이 순간에 머물며 영화의 여운을 느끼고 싶다. 그곳은 따뜻할까. 영화의 계절은 시종일관 차고 우울했는데, 그 두 등이 맞대어진 좁은 공간의 공기마저도 차가울까. 아마도 그곳은 따뜻하기를, 그곳에서는 욱스발이 따뜻한 남편이고, 든든한 아버지이고, 또한 듬직한 아들이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란다.



 우리 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Biutiful'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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