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새로운 연인이 탄생했다
우리는 현재, 그리고 한 때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연인이었다. 스티비 원더의 노래 'My Cherie amour'처럼 누군가의 아끼고 아끼는. 팻과 티파니도 보통 사람들처럼 아끼고 아끼는 연인과 가정을 꾸려 나름의 삶을 꾸려가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불륜남을 두들겨 패기 전까지는, 남편과 다툰 날 그를 교통사고로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들 이후 그들은 곧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끈을 놓치고 공동체 내에서 광인 취급받는 사람이 되었다. 팻은 접근 금지 처분을 받고 정신 병원에 입원했고, 티파니는 직장 내에서 섹스 스캔들을 일으켜 해고되었다. 연인을 잃었을 뿐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의 세상도 함께 무너졌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사랑을 잃으면 세상도 함께 잃게 되는 것.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이란 세상 그 자체이므로.
My Cherie amour. 나의 사랑스러운 연인.
하지만 세상의 이치에는 의외로 소심한 면이 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이 넋 놓고 앉아 세상 원망이라도 할라치면 이내 등 뒤로 살짝 다가와 다른 것들을 살짝 내려놓고 가곤 한다. 이를테면 희망이라던지, 새로운 연인라던지. 허나 그 새로운 선물은 기척 없이 다가와서 살짝 앉아있다가 저를 몰라주는 것 같다 싶으면 곧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곤 한다. 어깨를 툭툭 치며 '나 여기 있다'라고 일러주면 좋으련만, 우리는 때로 그 미세한 기척을 알아채지 못하고 영영 새로운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깨고 그 안으로 나 자신을 내던져야만 하는 때가 있다.
티파니는 팻의 아내에게 편지를 전해 주는 조건으로 댄스 경연대회에 함께 출전하자며 팻을 꼬여낸다. 둘은 서툴지만 차츰 박자를 맞추어 나간다. 고함을 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거짓말까지 하지만 결국 그들은 해낸다. 처음 만난 순간에는 이 또한 사랑임을 알아채지 못했을지 모르나, 여느 로맨틱 코미디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춤을 추며 눈을 맞춘다. 섬세하게, 그리고 천천히 서로를 받아들여간다. 팻과 티파니는 광인이 되어버린 서로를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였다. 티파니에 비해 팻의 깨달음은 느렸고, 자기 등 뒤에 바싹 앉아 있는 새로운 희망을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지만 결국은 희미한 희망의 기척을 읽어낸다. 눈을 맞추다 결국 눈이 맞는 순간이다.
지금 여기, 새로운 연인이 탄생했다.
팻은 아내에게 귓속말을 전한다. 그들의 마지막 대화일 것이다. 당신 덕분에 내 생의 어떤 시절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노라고,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부디 즐거이 지내라고…. 관객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아마도 그는 이와 같은 고백을 하지 않았을까. 아내의 마음에는 진즉부터 팻의 자리는 없었겠지만, 팻이 새로운 연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별의 절차를 거쳐야 했을 것이다. 되돌리고 싶은 사랑의 시절을 추억 저편으로 밀어두는 순간에 나 역시도 드디어 당신을 내 방에서 내보낼 수 있게 되었노라는 고백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팻을 미치게 만들던 노래 'My Cherie amour'는 새로이 태어난다. 물론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노래가 들려올 때면 체기를 유발하겠지만, 이전만큼의 고통은 아닐 것이다. 그 고통을 함께 나눠줄 티파니가 있기 때문에.
어떤 광기의 시절은 가고, 또 다른 광기의 시절이 온다.
이 영화는 팻과 티파니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럽지만, 팻의 주변 인물들 또한 아주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그리고 있다. 유일하게 평면적인 캐릭터가 있다면 팻이 재결합을 학수고대하며 애정을 쏟는 팻의 아내 니키뿐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이미 과거가 된 사람이 더 매력적이어서 무엇하겠느냐는 무언의 메시지인 것도 같다. 특히 팻의 아버지 역할로 분한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는 과연 명불허전이다. 포커스 아웃된 와중에도 관객의 시선을 붙잡아 놓으며 극을 이끌어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불사하는 미신에 심취한 아버지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리뷰를 쓰려니 사랑 지상주의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람에게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것, 그 때문에 크나큰 고통을 받게 하는 것, 심지어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고 또 다른 희망을 품게 할 수 있는 것도 세상에 사랑, 그 하나뿐이다. 곰곰 생각해봐도 그만큼의 치유력을 지닌 것을 찾기 어렵지 않은가. 내가 믿는 신도 결국 그 본질은 사랑이라 하셨으니 세상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장담한다. 사랑 빼면 이 세상은 별 볼 일 없어진다. 시시한 세상에 사느니 조금 상처받고, 조금 아프고, 때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트라우마를 얻는다 해도 사랑을 하다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어차피 죽게 될 인생, 외로워 죽느니 상처받아 죽겠다.
사실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 참 어려운 세상이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미쳐있다. 때로는 그 광기를 발현시켜 죽음도 불사하게 만드는 것, 그 광기를 잠재우는 것 역시 사람의 애정이고 온기다. 특히나 연인의 온기는 가장 강력하고 안전한 신경 안정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새로운 연인이 탄생하는 순간, 하나의 우주가 새로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