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름다운 문장의 꿈을 꾸기에 시시하지 않은 사람인가
어린이날이었다. 다행히 아직은 내게 장래희망을 묻는 사람들이 있어 그다지 늙어감을 실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생 독고다이라는 진리쯤은 백 년 전쯤 체득한 레벨 정도는 되었다. 내 인생 망하면 내 탓이고, 흥하면 남 덕이라는 어마무시한 책임을 지고 사는 어른이 된 것이다. 매해 늘어가는 나이 말고는 나를 어른이라 인정해줄 만한 것 아직 하나도 못 갖췄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 같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꼼짝없이 '어른'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연령대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내 장래 희망은 뻔했다. 선생님 아니면 화가였다. 만날 보는 사람이라곤 엄마 아니면 선생님이니 아는 직업군이 한정적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선생이라니. 사명감이란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인 내가 누구를 가르쳤다가는 여럿 인생 망쳤을 게 뻔하다. 화가라니. 사실 어릴 땐 누구나 그림 잘 그리고 좋아하지만 지금은 직선 하나 똑바로 못 긋고, '사람을 그려 보세요.' 하면 졸라맨 이상으로 어떻게 더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나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장래 희망 1순위로 꾸준히 하나를 밀어붙였는데, 정말 그 누구보다 심각했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확신에 가득 찬 초중고 시절을 거쳐 대학생이 되었으나 사랑하는 것과 직접 만드는 것은 아주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십 대 초반에 장래희망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 부끄러워서 쓰지는 못하겠으나 나를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살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모두 돈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일을 하고,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등지고, 열망을 억지로 잠재우기도 하지. 어쩌면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종종 한다. 돈이 문제가 되지 않는 꿈을 꾸기에 우리는 이미 늦은 걸까, 라는 생각도 든다. 어른은 새로운 장래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새로운 장래 희망을 갖는 건 정말 철딱서니 없는 일인 걸까, 하고.
사실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서있던 이십 대 초반에는 장래 희망이 하나 더 있었다. '시시한 어른 말고 멋진 어른이 되는 것'. 아직도 나 스스로가 눈물 나게 시시해서 미쳐버릴 것 같지만 아마 죽기 직전까지도 생각하겠지. '나는 멋진 어른이었나. 지금 죽어도 괜찮은가.'하고. 가만 생각해 보니 언젠가부터 내 장래 희망은 무언가 '되겠다.'라는 완결형이라기보다는 '되고 있다.' '되려고 애쓴다.'는 진행형으로 일평생을 다짐해야 할 삶의 기조 같은 것들로 변화했던 것 같다.
과연 장래희망은 명사형이기 보다는 하나의 완결된 문장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 말고 '글 써서 푼 돈이라도 벌며,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음을 인정받으며, 그 행위에 수반되는 모든 과정을 사랑한다.' 이런 식으로. 때로는 돈이 없어 다른 직업을 가질 것이고,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는 모습에 좌절도 할 것이고, 어쩌면 모든 과정 자체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가 모자라면 다른 하나를 채우는 식으로 꾸준히 해나가는 것, 그게 어른이 장래 희망을 갖는 방식이 아닐까.
혹시 모르지.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걸 다 이룬 자신을 발견할지도. 다 이루었구나 싶으면 마음에서 또 다른 문장을 꺼내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 된다.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이런 방식의 장래 희망을 가진 어른으로 사는 것은 절대 시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노력하는 것도 지겨우니 이대로 적당히 살다 죽는다.' 따위의 장래 희망도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도덕적, 윤리적, 법적 문제만 없다면. 우리는 모두 각기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존재하면 그만이다.
어쩌면 새로운 꿈을 갖기에 사치스럽고 죄스럽게 느껴지는 이 세상에 대고 어른도 꿈을 꿀 자격이 있다고, 어차피 망해도 내가 망하는데 뭐 어떠냐 하고 소리를 치고 싶지만, 사실 그러기에 나도 이미 많이 세사에 겁을 먹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비겁하게 꿈을 꾼다. 다만 나의 이 비겁함이 내가 존재하는 방식의 아름다움에 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진행형으로 꿀 수 있는 꿈이 항상 준비되어 있는 사람으로 살게 되길 바랄 뿐이다. 나의 문장은, 나의 장래 희망은 지금 어디쯤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나.
아직 아름다운 문장의 꿈을 꾸기에 시시하지 않은 사람인가.